2025년 03월
지인제 타로카드X서양판타지 신탁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메이지 록웰로 말할 것 같으면 앳된 얼굴에도 불구하고 척 봐도 검잡이임이 숨겨지지 않았으며, 태도가 새의 솜털처럼 마냥 가벼운 것 치고 호락호락한 부분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용병인 어머니를 따라서 온 세미니온을 떠돌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고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용인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이 한나 록웰이라고 하면 알아듣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 록웰이라면야.’ 하면서 말이다. 무엇을 납득했는지는 몰라도 메이지는 과거에 과장을 더했으면 더했지, 애써 감추려 드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었으므로 이번 일행에게도 그의 이력은 쉽게 알려졌다.
“이런 규모는 처음인가?”
갑옷의 이음매를 확인하는 메이지에게 누군가 물었다. 그는 수도 도트라에서부터 이곳 본데일까지의 여정을 함께한 용병 중 하나로, 보수를 받고 전쟁에 참전했다는 점에서 메이지와 다르지 않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나딕? 케일럽이었나.’ 눈을 마주쳐도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어 메이지는 그냥 웃었다. 분명 통성명하긴 했을 텐데, 그때 취해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친구가 보기엔 어때?”
그 말에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메이지의 호칭이 꽤 깜찍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자신은 있어 보인다만.”
“없으면 여기 있겠어?”
벌써 튀었지. 실제로 이탈자가 없진 않았으니 메이지의 말은 짓궂은 농담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말에 이름 모를 동료가 천막 위의 군기를 바라보았다. 황궁 직속, 데아 기사단의 깃발. 이번 일의 고용주였다. 고용주가 고용주이다 보니 전선 이탈은 탈영과 다름이 없다. 그건 단순 계약 위반으로 용병으로서의 명성이 떨어지는 일과는 조금 달랐다. 요즘 같은 전쟁통에는 몸을 숨기기 쉬운 만큼 처벌도 즉각적이었다. 그는 짧게나마 동료였던 자들의 미래를 안타까워하는 것인지 짐짓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정이 많은 사람이야. 그사이 메이지는 갑옷의 점검을 마쳤다.
데아 기사단이 주둔한 자리와 성문 사이에는 장애물이 없었다. 지형적으로는 그랬다. 견고한 성벽의 아래에는 대열을 맞추고 선 병사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분명 밭으로 쓰였을 들판은 병사들의 발자국으로 전부 짓뭉개졌다. 저런, 몇 년은 흉작이겠군. 메이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적진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걸치고 있는 장비의 생김새에 통일성이 없었고, 군데군데 선 깃발 속 문장이 전부 달랐다. 예상대로 집결한 가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시골 영지까지 부지런도 하지. 어쩌면 저들 사이에도 저 같은 용병이 있을지도 몰랐다. 고민하다 여벌의 검을 허리에 찬 메이지가 그를 부르는 호칭처럼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는 기사랑 같이 싸워본 적 있어?”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역시 잊은 게 분명하군. 데릭이다, 메이지.”
“워워, 사소한 거에 신경 쓰면 은퇴할 때 다 된 거야.”
농담이라도 퇴물이란 말은 듣기 싫었는지 데릭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뭐, 종종.”
“난 처음!”
그래서 좀 기대되네. 어떻게 되려나. 메이지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웃자 가로로 난 흉터가 구겨졌다. 곧 지휘관으로부터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슬슬 우리 차례인가? 가자, 데프.” 데릭은 메이지의 실수를 두 번 정정하진 않았다. 그들의 삶은 한데 뭉치지 않고, 어딘가에 고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나가는 삶이다. 그런 용병들 사이에서 사람의 이름을 외우지 않는 성미는 별로 특이한 축에도 끼지 못했다. “잠깐.” 대신 그는 다른 걸 지적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촐랑거리는 발걸음으로 대열에 합류하는 메이지를 불러세웠다.
“투구는 없나?”
메이지는 투구란 단어를 처음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기울이다 소리쳤다.
“걸리적거려!”
이 일은 메이지가 도트라에서 네 번째로 받은 의뢰였다.
첫 의뢰는 상단의 호위로, 나라가 뒤숭숭하고 각지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빈번하니 캐러밴이 수도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을 호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주요 고객이 귀족인지 운반하는 물품 중 다수가 귀중품이었다.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물건을 확실하게 지키고 싶었는지 상단이 고용한 용병의 수가 적지 않았고 의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 알음알음 몸값이 올랐다.
두 번째는 동굴 속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희귀 약재를 조달해달라는 의뢰였다. 박쥐를 조심하라는 친절한 조언과 함께였다. 글렌피스에서 이리 무리를 사냥하면서도 느꼈지만,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은 언제나 성가시기 그지없다. 날개가 달려있으면 더욱 그랬다. 박쥐 떼와 한참을 겨룬 뒤 동굴 구석에만 핀다는 꽃을 의뢰인에게 가져다주자 그는 메이지가 놓고 온 박쥐 사체를 아까워했다. 그 날개도 쓰임새가 많다나 뭐라나. 고용주의 간곡한 부탁에도 메이지가 동굴에 두 번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그가 추가 보수를 제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이게 참 가관이었는데… 이름도 처음 듣는 귀족 가문 도련님이 메이지를 콕 집어 결투의 대리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명예를 위해 결투해달라니, 용병에게? 수도 귀족이면 사병 정도는 거느리는 게 보통 아닌가? 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전쟁통에 수없이 관이 씌워졌다 목이 떨어지는 약세 귀족의 삶에는 더욱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남을 무릎 꿇리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그를 수락했으나… “장난해?” 검 한 번 제대로 들어보지 않은 어린애가 상대 쪽 대리인으로 나와 판을 엎었다. 그 과정에서 고용주를 위협했다는 소문이 퍼져(그는 중개인 앞에서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찔끔 오른 몸값이 도로 떨어졌다. 다행스럽게 귀족을 위협했다는 혐의는 상대 귀족의 증언으로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거참 싸우려고 판까지 벌인 마당에 양심적이기도 하지. 메이지로서는 행운이었으나 터무니없는 일을 겪었단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자 중개소에 남은 일이라곤 영 메이지의 성에 차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남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옆집 포크를 훔쳐다 달라는 황당한 의뢰도 있었다. 포크로 뭐할 건데? 굳이 수도까지 올라와 서성인 이유가 무엇인가, ‘견문을 넓히고 싶어서.’라고 말해도 틀림은 없으나 치레에 가까운 표현이다.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무언가 색다른 일. 그는 언제나 지루함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으나 생소함이 주는 자극 앞에선 자제가 없었다. 슬슬 북부로 갈까, 오히려 국경과 가까워지면 그가 찾는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마음이 동하는, 그런 일이.
“좀 재밌는 거 없어?”
마지막 한 번이라는 마음으로 메이지는 나탈리에게 물었다. 중개소의 카운터를 지키는 나탈리는 메이지와 제법 죽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그가 말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 만큼은 말이다. 나탈리는 맥주 한 잔을 내어놓으며 말했다.
“흠… 메이지, 큰 건도 해?”
메이지가 동전 하나를 그에게 튕겨주곤 단숨에 잔을 비웠다.
“내용 따라 다르지, 뭔데?”
“손이 가장 많이 필요한 장소가 어디겠어.”
“전쟁터지. 근데 수도에서 무슨?”
“재촉하지 말고.”
그는 믿을 만한 지인에게 들었다며, 곧 데아 기사단이 본데일로 출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본데일? 본데일이 어딘데.” “있어, 좀 남쪽에.” “바다 보여?” “그게 중요해? 그건 모르겠네.” “에잉.” 메이지가 계속 설명하라는 듯 허공에 손을 휘적였다. “반역이래.” “또?” “그렇지 뭐.” 메이지와 나탈리의 어조는 반역이라는 중죄와 어울리지 않게 가볍기만 했다. 요즈음 어디의 누군가 반역을 모의했단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 소문이 전부 사실이라 치면 세미니온 왕국에 반역자가 아닌 귀족은 없는 것 같았다. 어지러운 때라는 증명이나 메이지에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떨어지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래. 사람이 꽤 필요하겠네.”
몇 개의 가문이 집결할지 모르니 머릿수를 더 채워가려는 듯했다. 기사단이 용병을 고용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지만 농민을 징병하여 무기를 들려주는 것보다는 나은 판단이다. 이 나라에는 돈만 좀 쥐여주면 검을 휘두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차고 넘쳤다. 거기에 데아 기사단의 출병은 왕명. 세미니온 최정예 기사단의 이름으로 사람을 모은다면 보수는 기대할만했다. 나탈리는 며칠만 기다리면 중개소로도 의뢰가 들어올 것 같다고,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로 메이지의 발을 도트라에 묶어놓았다.
며칠 뒤, 메이지는 본데일로 출발하는 마차에 올랐다.
“이런~ 데릭, 이름 좀 외워주려고 했더니.”
데릭은 그 마차에서부터 함께였다. 오지랖 넓게 굴던 그는 머리가 깨져 죽었다. 할버드 같은 것을 휘두르면 투구를 쓰고도 꼴이 이렇게 된다. 맞아가며 상대해주는 것도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일이다. 뭐, 데릭이 맞고 싶어서 머리를 내준 건 아니겠지만. 메이지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병사를 베어 넘겼다. 그가 손에 든 것은 투척을 위해 개량된 짧은 창이었는데, 그런 물건을 들고 거리를 좁힐 생각을 한다니 제대로 된 병사는 아닌 듯 보였다. 잘 쳐줘야 수습생, 혹은 종자가 아닐까. 그가 중심을 잃고 땅으로 고꾸라졌다. 메이지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창을 주워 난투를 벌이는 병사 사이로 집어 던졌다. 비명은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말이 발을 구르는 소리에 묻혀 지워졌다. 창은 또 저 같은 이가 주워 누군가를 찌를 것이다. 아니면 녹이 슬도록 시체에 꽂혀있든지.
메이지는 이곳에 와서야 데아 기사단이 왜 용병까지 고용해가며 전쟁을 치르는지를 깨달았다. 한참이 걸려 도착한 본데일에는 이미 데아 기사단의 본대가 주둔해있었다. 자신들은 지원군이었던 셈이다. 나탈리도 여기까진 듣지 못했나 보지. 지방에서 수도로 올라오는 소식이란 대개 그런 법이었으므로 의아함은 없었다. 그보다 의아한 것은 데아 기사단의 행색이었다. 메이지는 그들이 든 날이 빠지고 손잡이가 부러진 무기를 바라보았다. 메이지가 타고 내려온 마차에는 사람의 수보다 많은 무기가 실려 있었는데, 그럼에도 데아 기사단 모두의 무기를 교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쟁이란 본디 오래 이어질수록 서로가 불리해진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들이 챙겨오는 무기가.
어디 한 군데가 빠진 건 무기가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세미니온 최정예 기사단이라 불리는 그들은 하나 같이 눈빛이 어두웠다. 몸은 전쟁터에 있으나 정신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명성이 무색해지는 몰골이었다. 죽어가는 이들도 마지막에는 눈에 열망이 고이기 마련이건만, 데아 기사단은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선 채로도 삶이라곤 모르는 사람들처럼 허망한 눈을 했다. 그래도 기사단은 기사단이라고, 그 꼴로도 검을 휘둘러 사람을 베고 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같은 싸움에 임하는 동료로서 이만하면 도리를 챙기는 편이다.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모자람은 없었다. 기사단이 다르긴 하네~ 메이지의 감상은 그 정도였다. 그는 그들의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해가 져서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 발 닦고 잠이나 잤다. 야습은 없었다. 두 진영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해가 떠오를 때 즈음 부딪히기 시작해 하늘이 어두워지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메이지는 자리에 우뚝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절 탓인지 성벽 뒤로 해가 넘어가면 하늘이 붉다 못해 핏빛으로 물들었다. 처음에는 경이로웠고, 보다 보니 하늘에도 전쟁터가 펼쳐진 것 같았다가, 이제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것참, 거지 같은 검이네.”
메이지가 그 기사에게 말을 붙인 건 본데일에 도착하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검이 이것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는 이곳에 온 지 벌써 2주나 되었다고 했다. 선발대 중의 한 명일 터였다. 짐 위에 걸터앉은 그는 퍽 지쳐 보였다. 투구에 눌린 머리카락은 정돈되지 않았고 수염도 벌써 한참은 깎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눈빛까지 흐리멍덩하니 갑옷을 꼼꼼하게 차려입고도 사람이 어수선한 기운을 풍겼다. 쉽게 말해 땅에 꽂혀있는 너덜너덜한 검보다 더 쉽게 부러질 것만 같은 꼴이었다.
“검이 왜 이것밖에 없어. 기사단 아냐?”
“아무도 주질 않더군.”
“왜?”
그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모르는 건가…. 메이지는 자기가 대장장이여도 이 딱해 보이는 기사에게는 검을 주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쓰일 줄 알고. 눈앞의 기사는 잘 드는 검이 있으면 금방이라도 딴마음을 품을 것 같았다. 검으로 적군이 아니라 제 목을 찌를 것 같다는 얘기다. 하지만 메이지는 대장장이가 아니었고 그가 검으로 목을 찌르든 심장을 찌르든 알 바 아니었다. 메이지가 챙겨둔 여분의 검을 그의 검 옆에 꽂았다. 어디서 산 검이었더라. 썩 좋은 검이라 할 순 없었다. 그가 주로 쓰는 검은 한나에게 받은 검이고, 그 외의 것은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구해서 썼다. 그래도 날만큼은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이가 다 빠진 허접한 검 옆에 있으니 더욱 번쩍이는 것 같았다. 메이지는 기사에게 검을 내어주는 대신 그에게서 강탈할 만한 물건을 모색했다. 마침 그는 옆구리에 투구를 끼고 있었다. 데릭 생각에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거절을 표했다. 쫌생이, 구두쇠. 상대가 데아 기사단이라면 귀족임이 분명한데도 메이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비난했다. 기사는 불경을 지적할 기운도 없는 건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거래는 하되 적선은 없다. 이것은 용병의 보편적인 정서다.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한참 고민하는 것도 메이지의 성정에는 맞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생각을 골몰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에는 재능이 없었다.
메이지는 바닥에 꽂은 검을 다시 빼 들었다. 기사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표정이었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 되어 하늘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비춰보니 검날에도 붉은빛이 어려 꼭 피에 물든 것처럼 보였다가, 이내 제 빛을 찾아 반짝였다. 메이지는 그대로 기사의 검을 발로 찼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검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 운명했다.
“지금 무슨….”
“자, 이제 이거 써야겠네!”
받을 보상이 보이지 않자 행패를 부린 셈이다. 그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 소리 내어 웃어 재끼다가 상대에게 검을 넘겨주었다. 꼴이 이런데 뭘 받겠어? 나중에 주고 싶은 거 있으면 찾아오든지. 나 이거 기억해둔다! 이래 봬도 기억력 좋거든. 기사는 별 희한한 사람 다 봤다는 눈치로 그를 보다가 검이 급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메이지에게서 검을 건네받았다. 검을 손에 쥐여주니 아까보다는 꼴이 조금 나았다. 흐리멍덩한 눈이 조금은 생기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착각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메이지는 이 상황이 제법 즐거웠다. 이 칙칙하고 황량한 전쟁터에서 이런 사소한 재미 정도는 추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었다.
“날 잘 드니까 수염도 좀 깎고, 엉? 차려입으면 잘 생겼을 것 같은 사람이.”
아, 당신이 내 취향이란 말은 아니니까 걱정 마!
기억하겠다 호기롭게 소리쳐놓고 메이지는 금방 이 일을 잊었다. 넘겨준 검도 곧 죽을 얼굴의 기사도 그에게 인상깊은 것은 아니었다. 공성은 지난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데아 기사단이 승기를 잡았다. 본데일의 보급로를 전원 차단했으니 이는 당연한 흐름이었다. 자신을 지켜주는 성벽 안에 갇힌 본데일의 군은 영지민을 굶겨 죽일 수 없다며 항복 의사를 전했다. 여전히 목이 붙어있는 귀족과 각지에서 모인 반역자의 사병과 영지의 처리는 기사단이나 행정관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용병들은 데아 기사단이 열어준 연회를 거나하게 즐기고 각자의 보수를 챙겨 본데일을 떠났다. 메이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은 기억이라곤 술과 고기, 그리고 그 앞에서 체면치레하고 서 있는 데아 기사단의 어두운 낯짝을 보고 비웃은 일 따위다. 그들이 두둑하게 챙겨준 금화를 들고 직후엔 어디를 갔던가. 당초 생각했던 북쪽이었나, 아니면 다시 수도로 돌아갔던가. 이제는 걸어 다니기가 지겹다고, 가는 길에 말을 구해 서쪽의 황량한 들판을 달렸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 모든 건…
그가 바다에 닿기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
“그러니까….”
대륙의 최남단 써드빌. 밭에서는 뜨거운 햇살과 바닷바람을 견디며 과일이 영글고, 해변에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그곳을 지키는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의 단장, 오즈월드 펄 써드는 부하들의 보고를 듣고 별 황당한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원흉인 메이지는 미남의 기가 찬다는 표정을 보고도 별 타격이 없는 듯, 종전과 변함이 없는 어조로 쾌활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아, 내가 너무 빨리 말했나? 못 알아들었어? 메이지는 방금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오즈월드가 순식간에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애초부터 그에게 넘어오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메이지의 옆으로 서넛의 단원들이 더 서 있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단장을 위해 메이지의 말을 멈출 수 있을 만한 참된 인재는 선써드 내에 없었다. 오즈월드에겐 비극적인 일이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날, 그러니까 어제. 메이지는 오후 교대조였다. 물론 업무 시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선루스 기사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게 부단장이라 할지라도. 그는 마을을 순찰하다 마주친 단원 몇과 주민 몇몇을 모아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 주인으로부터 ‘선대가 창고에 처박아둔 좋은 포도주를 이제야 발견했는데 메이지 몫 몇 개 빼둘까?’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부터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메이지야 갓 딴 포도를 으깨놓기만 한 물건이라도 좋다고 마셨지만 절대 주는 술을 마다하는 자가 아니었다. 술은 그냥도 좋은데, 좋은 것이라니 더 좋겠지. 그리고 술을 한 번에 몇 병이나 비우는 것치고는 잘 취했고, 취하면 많이 들뜨고 많이 웃었다. 별스러운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자, 봐. 그는 묘기를 보여주겠다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언젠가부터 메이지가 들고 다니는 비싸 보이는 검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선 메이지는 손짓 몇 번에 검 손잡이로 와인 병의 코르크를 땄다. 명검이 코르크 따개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메즈, 가만두면 또 저런다니까. 제인이 잘 구운 소시지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 말처럼, 몇 번 그 재주를 본 단원들은 익숙하다는 듯 그 행태를 바라보았지만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술이야 어차피 따놓으면 다 먹어 없앨 것이기 때문에 메이지는 몇 차례 그 짓을 반복했다. 그러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에 금이 갔다. 그가 보여준 묘기가 단순해 보여도 힘이 많이 들어가는 행동이었는지, 평소 휘두른 습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은 금에서 멈추지 않고 날 전체로 퍼지더니 산산이 부서져 온 사방으로 튀었다. 만취한 상황에서도 메이지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어 쏟아지는 파편을 전부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쳐낸 것이다. 아까보다도 더 묘기 같은 광경에 사람들은 다칠 뻔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 다시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그러니까.”
그즈음 오즈월드가 드디어 메이지의 말을 자르고 다시 한번 운을 띄웠다.
“망가지기 시작한 검으로 와인을 따다가 부서진 파편을 받아낸 걸로 박수를 받으며 과음하느라 옆집에 불난 걸 모르고 있었다고?”
“요약하면 그렇네.”
보기 드문 구경에 주인은 메이지에게 공짜로 와인 몇 병을 더 내주었고 술자리는 밤이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그것들은 평범하게 코르크를 땄다). 마을에서 불을 밝힌 곳이 술집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 누군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술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불이야! 주정뱅이들은 그 외침을 단박에 알아듣지 못했다. 어, 술? 남았지. 앉아, 앉아. 아니, 헛간에 불이 붙었다고!
다행스럽게도 피해는 헛간 하나가 까맣게 타들어 간 걸로 그쳤다. 술기운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이들이 불이라는 말에 모두 밖으로 뛰어나가 물을 길어온 덕분이었다. 연기가 고여 그을음이 남은 집을 다시 쓰려면 보수를 해야겠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어딘가. 위층에서 잠을 자던 아이는 벽을 기어올라 자신을 구하러 온 메이지를 숫제 영웅처럼 섬기게 되었다.
검을 깨 먹은 것부터가 이마를 짚을만한 일인데 어쨌든 불은 껐고 다친 사람은 없으니 되지 않았냐며 메이지는 단장실에서 뒷짐을 지고 삐딱하게 선 채로 휘파람이나 불었다(“근데 메이지, 나 그거 하나 맞은 거 같아요.” “진짜? 어디 봐.” 세이런 말에 상처를 찾는답시고 사람을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또 주변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는 부단장이라는 직함을 차고도 단장실을 찾는 일이 드물었는데, 한 번 왔다 하면 이런 식으로 황당한 이야기를 남겨 폭풍처럼 실내를 휩쓸었다. 씩 웃는 메이지의 얼굴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기사도를 바라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손 남는 녀석들은 가서 도와주라고 해. 이상.” 뭐, 그랬다. 오즈월드는 본래 부하를 길게 질책하는 법이 없는 상관이었으므로 결론만큼은 간단했다.
“이상이란다, 가자!”
메이지가 의무실에 가라며 세이런부터 바깥으로 몰아내자 다른 단원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근데 어제 술값 누가 냈어요? 난 안 냈는데, 낸 사람 있어? 나도 아냐. 하나 같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이 도통 기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단복만 걸치고 있으면 뭐 하나, 무전취식범이 따로 없는 것을.
“맞다, 단장.”
“보고가 남았나?”
“아니, 나 검 좀 줘.”
오즈월드는 부단장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그는 그냥 날강도였다.
“이건 돌아가신 선대 써드 백작이 남겨준 유품인데.”
그리하여 오즈월드의 책상 위에 날이 부서져 손잡이만 남은 검이 올라왔다. 음각으로 새겨진 가문의 문장이 검의 원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오, 유감이야.”
“전쟁통도 아닌데 날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건 처음 보는군.”
“그러게 말이야. 이거 순 엉터리 검 아니야?” 메이지는 유품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애석해하는 기색도 없이 검과, 나아가서 그 검을 건네준 오즈월드를 비난했다. 이거 나 부단장 잘하라고 준 거잖아~ 메이지가 시장 바닥에 드러누운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떼를 썼다. 아니, 써드빌의 어떤 어린아이도 이런 식으로 굴진 않을 것이다. 메이지는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 드러누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오즈월드가 원해서 준 검도 아니었다. 그는 좋아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남이 차고 있던 검을 갈취했다는 과거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메이지 군, 보검이 무슨 의미인지 아나?”
오즈월드가 진중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제 기사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비싸고 잘 든다?”
“오래되었다는 뜻이라네.”
“오….”
그러고 보면 전조는 있었다. 메이지는 아침을 회상했다. 검날을 닦고 햇살에 비춰보았을 때 그는 묘한 얼룩을 발견했다. 그 얼룩은 지워지지 않고 그럴싸하게 검날과 어울려, 본래부터 검에 아로새겨진 무늬같이 보였다. 이런 게 있었던가? 오래 써서 생긴 걸지도…. 훈련장에서 주워 쓴 검이었다면 대번 내버렸겠지만, 검의 출처가 출처다 보니 메이지는 안일하게 그 얼룩을 보고 넘겼다. 무늬가 아니라면 나중에 갈아내면 되겠지, 하고.
“그냥 무늬인 줄 알았는데….”
“훈련장의 검은 성에 차지 않나?”
혼잣말과 오즈월드의 물음이 겹쳤다. 뭐라고 했지? 메이지는 혼잣말이라곤 한 적도 없는 사람처럼 오즈월드의 질문에만 대답했다. 당연히 성에 안 차지!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은 언제나 인력 부족으로 훈련장에는 남아도는 무기가 많았다. 주인 없는 무기 역시도 주기적으로 손질해주긴 했으나 쓰지 않는 날붙이는 손을 탄 것보다 쉽게 상했고 써드빌의 바닷바람이나 따뜻한 기온과는 극악의 상성을 보였다. 당연히 손질하면 못 쓸 건 없지만 메이지는 그걸 언제 손질해서 언제 길을 들이냐고 투덜거렸다.
“괜히 좋은 검을 줘서 버릇을 잘못 들였어.”
“그래, 다 단장 탓이야.”
장단을 맞춰주자 메이지는 겸양도 모르고 오즈월드를 힐난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오즈월드는 메이지가 손에 잡히는 무엇으로도 사람의 급소를 찌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안다. 메이지도 단장이 지금 자신의 생떼를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러니 더 물고 늘어지는 것이긴 해도. 오즈월드는 무언가를 고민하듯 턱을 괴고 반토막이 난 검을 내려다보았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이 고개를 기울이자 이마를 스치고 흘러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이지는 그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아 책상 위로 발을 올렸다. 예의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자세로 그는 숨도 쉬지 않고 칭얼거렸다. 단장은 맨날 푼돈은 돈도 아니라며, 검 하나 얼마 한다고. 다른 애들한테도 기분 좋으면 턱턱 내주면서, 쫌생이, 구두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오즈월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검이라고 부를 수 없는 물건을 다시 메이지에게 던져주었다.
“안 그래도 생각하던 게 있어. 같이 좀 가지.”
“응? 응. 어디 가는데?”
“일단 따라오게.”
오즈월드는 그에게 시간이 되냐는 질문은 예의상으로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메이지의 상관이었고 선써드의 기사는 남는 게 시간이었으므로.
오즈월드도 남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 이번 일의 보고서는 아드리안에게 맡겨버린 듯했다. 목적지는 본데일. 본데일이 어디더라…. 길이야 단장이 잘 알겠지. 메이지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겠다는 오즈월드의 통보를 받고 메이지는 시간에 맞춰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는 타고 갈 말을 고르기에 앞서 털이 반질반질한 조랑말에게 당근을 챙겨주었다. “데이, 착하지.” 이 조랑말은 메이지가 근처 도시의 영주를 호위해 준 뒤 그와 술 내기를 펼쳐 상으로 받아온… 유서가 깊다고 해야 할지 희한한 말이다. 이름은 테사가 지었다. 써드빌에는 웬즈데이라는 말이 있고, 이 말은 그 말보다 작으니 데이가 어떻겠냐고. 연관성은 전혀 모르겠으나 대안이 없으면 조랑말의 이름이 오트밀, 머쉬룸, 혹은 너츠(전부 메이지가 제시한 이름이다)가 될 상황이어서, 그때부터 조랑말은 데이가 되었다. 메이지는 조랑말을 오트밀이라 부르지 못하게 되어 못내 아쉬워하는 듯했으나… 아무튼 데이를 꽤 예뻐하는 편이었다. 그는 언제나 동물들과 친근했다. 데이만 당근을 챙겨주었더니 잠에서 깬 말들이 투레질을 시작해 결국 가져온 당근 한 바구니를 다 비웠다. “녀석들. 건강하네!” 그중 한 마리를 골라 밖으로 나오니 해가 뜨고 있었다. 희게 빛나는 해가 떠오르자 도시가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매일 찾아오는 기적의 순간이다.
“계속 달려서 갈 거니까 용건이 있으면 지금 말하도록.”
그 기적을 뒤로 하고 나타난 오즈월드가 나타났다.
“우리 지금 전쟁통이야? 뭐가 그렇게 급해?”
말에 오르자 오즈월드는 몇 마디 말도 없이 말을 몰았다. 하는 수 없이 메이지도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대신 그의 옆으로 바짝 말을 붙이며 큰 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단장!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 봐. 대답이 돌아오든 않든 신경도 쓰지 않는 그 행태에 오즈월드가 잠시 속도를 늦췄다. 메이지에게는 몇 가지 사소한 재주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마차나 말 위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혀를 씹지 않는 것이었다.
“상관이 음유시인인 줄 아나.”
“에이, 딱딱하게 굴지 말고. 대장간에 마지막으로 간 건 언제?”
오즈월드는 날을 헤아리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할 정도로 오래 안 갔다고?”
“글쎄, 10년 전에는 갔었나.”
“오, 이젠 단장이라고 대장간은 직접 안 가신다~”
메이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오즈월드는 그의 웃음과 비아냥을 무시하곤 다시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아, 단장~ 같이 가! 혼자 저 멀리 앞서 나간 오즈월드를 메이지가 순식간에 뒤쫓아 따라붙었다. 써드빌에서 본데일까지는 말을 달려 반나절. 가는 내내 지금 같은 대화를 반복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