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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 to the borderline (with 리온)
뒤돌아 볼 시간은 없고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우리가 닿길 바라는 건 하나의 별.
HOLY 2026.05.10.   17:47

2025년 03월

지인제 타로카드X서양판타지 신탁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합작 링크

 

 

어느 날 불쑥 나타난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저 산 너머에서 왔노라고.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보더라인에서 내려오는 건 괴물들 뿐이야. 나는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저 황량한 들판 너머, 모든 걸 막아서는 모양새로 우뚝 선 그것을 이곳 사람들은 산이라 부르지 않았다. 고작 그런 단어로 부를 수 없었다.

그들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괴물이겠군.

나는 보더라인의 괴물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한눈에 담을 수 없는 덩치와 바위보다도 단단한 껍질을 가졌다. 하나뿐인 눈동자는 그 안에 사람 하나 정도는 쉽게 빠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행동에는 악의가 도사려 발걸음 한 번에 집을 짓뭉개고 온 마기을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그랬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에게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와 다르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보더라인에서 왔노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건 허풍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그 사실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들 역시 나의 공포를 읽었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 왕국력 3년, 어느 여행자의 일지.

 

 

“리사.”

리사는 단순하게 높은 곳을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방향을 찾는답시고 나무 위로 올라간 벨리사를 보며 리온은 불현듯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나무를 잘 탔나……. 과거를 차근히 되짚어보니 지금의 깨달음은 충분히 알고 있던 사실을 되새김질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으으으음~!” 나무 위의 벨리사는 얼굴 위로 손차양을 드리운 채로 무언가를 찾듯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어때.” 내려오라거나 위험하다는 말을 건네는 대신 리온은 질문했다. 벨리사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나뭇가지에 매달려 휘적휘적 몸을 흔들더니, 도움닫기도 없이 훌쩍 뛰어 아래로 내려왔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날랜 몸놀림이었으나 그런 모습을 매번 봐온 리온의 표정은 미동도 없이 평온했다. 더 나아가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읏차. 착지하며 바닥을 짚느라 흙이 묻은 손을 탁탁 털며 벨리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쪽 맞다고 했지~? 후훙, 저쪽에 마을 보이더라.”

그 자신만만한 태도를 리온이 농조로 되받았다.

“지도 간수를 잘했으면 진작 도착했겠지만….”

두 사람은 벌써 이레째 산을 넘고 있었다.

최초에 산으로 접어든 이유는 이 산맥의 건너편으로 편지를 운송해 달란 부탁을 받아서였다. 산 너머로 시집간 딸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안부 편지였다. 파발꾼을 써도 좋을 일을 이들에게 부탁한 것은 이곳의 산세가 워낙 험해 지나는 여행객도, 물건을 팔러 오는 캐러밴도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신원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가에게 이런 편지를 맡기는 행위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싶어도, 벨리사의 존재는 언제나 그러한 의문을 손쉽게 해소했다. 그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신뢰를 사고, 식사 한 번에 누구와도 허물없는 친구가 되는 기이한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이 부탁도 하룻밤 머물게 된 집(이 역시 벨리사가 수배한 것으로 여관조차도 아니었다)에 농작물을 전하러 온 이웃 주민과 삶은 달걀을 나누어 먹다 받아온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벨리사는 타인의 곤란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리온은 그에 대해 반박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두 사람이 마을을 떠나기 전 편지와 함께 약간의 식량과 지도를 건네주었다. 이 산은 경사가 가파른데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지 않아 길이 옳게 나 있지 않으니 지도가 필요할 것이라면서. 그건 제대로 된 지도라기보단 기억에 의존해 얼기설기 그려낸 약도처럼 보였다. 아마 부탁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었으리라. 만만찮은 산처럼 보였는데, 잘됐네요! 벨리사는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그들의 배웅을 받았다.

“어, 없다.” 그리고 그날 밤, 벨리사는 지도를 잃어버렸다. “편지는?” 천만다행으로 편지는 온전히 있었다. 야영을 위해 짐을 풀던 찰나에 놓쳐버린 것일까? 작은 종이였으니 바람에 날아갔을 수도, 새나 다람쥐 같은 작은 산짐승이 물고 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벨리사는 생각지도 못한 실수에 크게 상심하며 자책했으나 시무룩하게 하룻밤을 보내고선 부러 더 씩씩하게 앞서나가며 길을 찾았다. 그 결과 나흘이면 넘을 수 있을 거라 들은 산을 이레 동안이나 헤매버리고 말았지만.

“우, 그건 미안하다니까아.”

과장되게 절절매는 투였다. 리온에게도 벨리사를 탓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니, 그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벨리사가 장단을 맞춰준 셈이었다. 애초에 방향을 확인하는 정도라면 리온의 비행 마법도 있었고―그러니까 벨리사가 손수 나무를 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외에도 리온은 길을 찾는 데 쓸만한 마법이나 지식을 십수 가지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벨리사에게 모든 걸 맡기는 이유는 그들의 여행이 서두를 까닭이 전혀 없는 여정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가자. 오늘은 침대에서 잘 수 있겠네.”

“응!”

 

 

왕국력 224년.

작은 마을에 소란이 일었다. 낯선 자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싶더니 빵집 근처에 오래 비어있던 집이 수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왕국 벽지의 자그마한 영지는 워낙 굴곡 없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지라 이 일은 주민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누군가 큰 죄를 저질러 유배를 오는 것이라든지, 돈 많은 자산가가 요양을 위해 별장을 꾸리는 것이라든지 근거 없는 소문이 부풀어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날, 투박하지만 견고한 마차를 타고 마을에 도착한 노부부는 저들의 이름을 클라인이라 소개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성에서 그 무엇도 유추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좌천된 귀족이나 요양해야 하는 병자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가구나 장식품 따위를 만드는 목공소를 차리고자 했고, 이름이 없던 집은 곧 클라인 공방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만, 마을에 당도한 것은 노부부만이 아니었는데… 벨리사의 부모님은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인형처럼 작고 예쁜 애가 품에 더 작은 애를 안고 있더라니까.

 

그 작은 애의 이름은 시온, 더 작은 애의 이름은 리온이었다.

여덟 살이었던 시온은 그즈음의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보기 드문 마차를 구경하러 온 또래 아이들이나, 새로운 이웃을 환영하기 위해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을. 반면 그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리온은 그때의 일이나 이 마을에 오기 전의 생활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그래!”

“넌 여기서 태어났잖아.”

이 마을 토박이면서,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투로 리온이 말했다. 대꾸하면서도 눈은 계속 무릎에 얹은 책을 보는 채였다. 벨리사는 리온이 저를 보든 말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아~ 시온 언니랑 리온이 처음부터 우리 마을에 있었던 것 같다구. 케이 언니도 그렇대!” “그래? 뭐…. 워낙 어릴 때니까.” 클라인 공방 근처의 빵집에는 연년생 자매가 살았다. 그중 동생인 벨리사는 리온과 동년배였으므로 자매가 그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벨리사의 말에 수긍한 리온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잖아. 엄청엄청 어릴 때.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기억하는 거.”

“응.”

리온의 덤덤한 대답에도 벨리사는 그의 곁을 지키며 조잘조잘 입을 놀렸다. 초여름, 무성하게 자라난 들판의 잔디가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벨리사는 옷에 풀물이 들건 말건 이제 숫제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책을 읽는 와중에 벨리사가 하염없이 재잘거리는 것도, 대화 중에 리온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도 서로에게는 익숙한 일이라 상대의 행동에 지적은 없었다. “나는 그게 식탁이거든. 우리 집 빵 냄새가 나고, 따뜻하고. 다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데… 리온 네도 있었어.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시온 언니랑 너까지.” “그건 신기하네….” “리온은 어때?” “나? 나는….” 벨리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리온의 기억 역시 비슷했다. 벨리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의 곁에 존재했다. 조부모에겐 친손녀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시온을 자매처럼 따르며 제게도 손을 뻗어주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아!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벨리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행동에는 리온도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오실 때 됐다.”

가자, 리온. 기억 속의 모습처럼 벨리사가 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손을 잡았다. 풀잎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 사이로 벨리사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클라인 부부로 말할 것 같으면 두 손자의 교육에 열의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생활 공간에는 손 짚는 곳마다 책이 있었고, 시온과 리온도 호기심이 왕성하여 온 세상의 지식을 탐독할 것처럼 굴었다. 명석한 남매는 그 방대한 양의 장서를 끝없이 읽어나감과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교원들과 수업도 병행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선 보기 드문 학구열이었다. 인자한 클라인 부부는 마을 아이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남매와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따스한 배려심이었다. 덕분에 수혜 아닌 수혜를 본 건 벨리사와 그의 언니 케이트였다. 케이트는 틈만 나면 클라인 가에서 책을 빌려 읽었고, 벨리사는 시온과 리온의 옆에 끼어 수업을 듣길 즐겼다. 수업 내용보다도 두 사람과 무언가 함께한다는 점을 좋아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개중에 벨리사가 강한 흥미를 느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검술이었다.

“우왓.” 딱! 소리와 함께 벨리사의 목검이 떨어졌다. 그는 냉큼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한 번 더 하자!” “벌써 세 번째인데….” “에이, 한 번만 더.” 검술 수업의 끝을 대련으로 마무리하는 건 어느새 그들 사이의 규칙처럼 자리 잡았다. 검을 처음부터 능숙하게 다룬 건 리온이었으나 놓쳤을 때 다시 주워 드는 건 벨리사여서, 이들의 대련이 언제 끝날지는 전적으로 벨리사의 기분에 달려있었다. 그 꾸준함 때문일까? 처음에는 한 합으로 끝나던 대련이 점점 길어지더니, 요즈음에는 리온의 검을 떨어뜨리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아.” “아자!” 바로 지금처럼. 리온이 떨어진 검을 내려다보자 벨리사가 먼저 그 검을 주워 리온에게 내밀었다. “한 번 더?” “음… 봐주면 안 될까.” 지켜보던 선생님도 오늘은 이만하자며 벨리사를 만류했다. “아하하.”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땀투성이 얼굴로 벨리사는 기분 좋게 웃었다. 즐거운 날들이었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하산~! 산길을 벗어난 벨리사가 양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 입구를 지키는 위병이 보였다.

“고생했어.”

위병을 본 리온이 벨리사에게 손짓했다. 벨리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수풀을 헤치며 걷느라 풀어진 벨리사의 로브를 다시 꼼꼼하게 둘러주고 후드까지 씌워주었다. 익숙하게 그의 손길을 받은 벨리사가 그에게 한 번 웃어주고는 손목에 묶어두었던 손수건을 얼굴에 둘렀다. 그렇게 채비를 마치고 나서야 둘은 나란히 마을 입구로 향했다. “여행자가 많이 들리는 곳은 아닌데, 먼 곳까지 왔네.” 복면까지 쓴 모양새가 상당히 수상해 보였으나, 위병은 그다지 그 모습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산을 넘어온 여행객이라는 말에 험한 산을 넘어왔다니 대단하다며 둘을 추켜세우기만 할 뿐이었다. 인사 몇 마디를 건네고 나자 두 사람은 곧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인파가 많은 거리에 들어와서야 벨리사는 손수건을 풀어 다시 손목에 묶었다. 여관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시선들은 벨리사가 후드를 푹 눌러 써 얼굴을 가리면 금방 사라지고는 했다. 마을에서 보기 드문 여행자의 행색을 했다고 모이는 이목이 아니라는 뜻이다. 

“매번 불편하지?”

이럴 때마다 벨리사는 드물게 위축된 태도를 보였다. 리온은 후드 위로 벨리사의 머리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괜찮아.”

 

언제까지고 그런 날들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는 평범한 날들이.

허나 시간이란 건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라, 몇 해 전에는 거짓으로 판명 난 일도 진실이 되고는 했다. 노쇠한 클라인 부부에게 요양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 마을도 요양에만 힘쓰기에 조건이 나쁘지 않았으나, 부부는 눈앞에 일이 있으면 움직이고 싶어진다며 공방을 그대로 두고서 옆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공방은 자연스럽게 시온과 리온이 물려받았다. 워낙 다재다능한 남매여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 처리는 클라인 부부가 있을 때와 다르지 않게 매끄러웠다. 누군가 무례하게 행동하려 들면 어린 애들한테 그러고 싶냐며, 벨리사의 부모님이 면박을 준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새로운 클라인 공방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무렵, 시온으로부터의 선언이 있었다. 벨리사. 나, 떠나기로 했어. 벨리사는 깜짝 놀라 그와 함께 찾아온 리온을 바라보았다. 리온과는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는 시온의 말에도 놀라거나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일찍부터 시온은 모험을 떠나고 싶어 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시온은 본인이 행하는 모든 일에 마음을 쏟는 사람이라, 벨리사는 이 모험이 아주 오래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 작은 영지의 바깥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시온은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벨리사를 꼭 안아주었다. 편지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종종 돌아올 거야.

“리~온. 아직 많이 남았어?”

“조금.”

시온이 떠나도 리온의 생활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는 대체로 혼자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이고, 그들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개인적인 교류는 이웃인 벨리사의 가족에 그쳤다. 여가의 대부분은 공부에 시간을 쏟았는데, 그런 리온의 공부를 방해하는 건 벨리사의 주된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리온의 집중력은 벨리사의 소심한 훼방에 끊어질 만큼 얄팍한 것이 아니어서 벨리사는 언제나 그가 공부를 마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리고는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공부하는 건 뭐더라. 저번에 들었었는데…. 다재다능한 리온은 공부하는 분야가 시시때때로 바뀌곤 했다. 매사 무던하게 구는 리온이 그나마 진득하게 손에 쥐고 있는 건 마법이었는데, 벨리사는 그것이 학문적인 관심보다도 실용의 측면이 아닌지 의심하고는 했다. 리온 혼자서 이 큰집을 관리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마법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창밖을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해 질 녘에는 방에서 나오겠지? 어릴 적부터 제집처럼 드나든 리온의 집이다.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낼 방법은 무수히도 많았다. 쿠키는 어제 구웠으니까, 오늘은 책을 읽어볼까…. 벨리사는 글줄에는 영 관심이 없었으나 왕국에 얽힌 전설이나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읽는 건 좋아했다. 시온이 모험을 떠난 뒤에는 부쩍 더 손이 갔다. 언니도 이런 여행을 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 어쩐지 글이 더 잘 읽히는 기분이었다. 모험을 떠난 시온에게까지 생각이 닿자 저번에 읽다 만 여행자의 수기가 떠올랐다. 그 수기는 오랜 예전에 쓰였다 기록되어있는 만큼 허풍이라는 말도 많았지만 벨리사의 관심을 끌 정도로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오늘 오후는 그걸 마저 읽어야겠다. 벨리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꺄악!”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리온은 벨리사의 비명과 뒤이어 들려오는 둔탁한 소음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집안에서 들을 일이 없는 소리에 그는 얼굴을 굳히고 서재로 달려갔다. “리사.” “리, 리온~.” 서재 안, 벨리사는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주변에 책이 잔뜩 쏟아진 걸 보면 리온이 들은 둔탁한 소리는 책이 쓰러지면서 난 소리 같았다. 리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안 다쳤어?” “으응.” 대답하면서 벨리사는 제 손바닥이나 몸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미안, 놀랐지.” “안 다쳤으면 됐어.” 그는 벨리사를 부축해 일으켰다. 정말로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벨리사는 무언가를 보고 놀란 사람처럼 다소 얼이 나가 있었다. 주변의 늘어진 책의 모양새도 이상했다. 벨리사가 아무리 부주의하게 굴었대도 바람에 날린 것처럼 책들이 바닥을 구를 리는 없었다. 벨리사는 책 한 권을 가리켰다. 리온이 반사적으로 책을 집어 들려고 하자 벨리사가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아 만류했다.

“그, 일단 만지지 말아봐.”

“왜?”

“그게….”

벨리사는 당황이 가시지 않았는지 횡설수설했으나 리온은 차분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전에 읽던 책을 읽으려다가, 생각보다 더 높이 있어서… 근데 손이 닿을 것도 같았거든? 사다리가 없어도 될 것 같길래, 그냥 뽑았는데….” 요컨대 찾던 책이 아닌 다른 책을 뽑았다는 얘기다. 애써 꺼낸 책이 목표한 것이 아니었다는 허탈감도 잠시, 벨리사는 이 역시 소설책이라면 읽어볼 심산으로 책을 펼쳤다. 내용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책을 펼치자마자 갑자기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책의 주변으로 돌풍이 일었다. 비명은 그 순간에 지른 것이었다. 설명을 끝까지 듣고 나서 리온은 문제의 책을 손에 들었다. “헉, 괜찮아?” 벨리사는 쭈뼛거리며 그의 뒤에 붙었다. “마력은 남아있지 않은데….”

그것은 마법서였다.

주의를 요하는 책이나 물건들은 전부 지하에 보관해두었다. 그렇다면 이건 책이 지닌 마력이 미약하여 클라인 부부가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펼치면 무작위로 효력이 발동하는 것 같고…. 일회성인가?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리온은 제 옷을 당기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벨리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큰 사고를 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이제 그냥 평범한 책이야.”

“그럼 괜찮은 거지…?”

“네가 괜찮은지는 이제 알아봐야지.”

리온은 엉망이 된 서재를 마법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영창 없이 손짓 한 번으로 마법을 일으키는 리온의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하기만 했다. 벨리사는 이런 상황에서도 엉뚱한 생각을 해버렸다. 거 봐, 청소 때문 맞다니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이 일은 벨리사에게 약간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문제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애매한 변화가. 리온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에겐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력을 운용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데(“그럼 우리 엄마나 아빠도?”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지금의 벨리사는 몸 안의 마력을 불러일으키려 해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했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바란 적은 없었으니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지 않냐는 벨리사의 말에 리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떤 일이 생길지 전혀 예상되지 않아. 그게 문제야.

그 ‘어떤 일’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벨리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언제나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 치고는 얌전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마을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말썽꾸러기들이나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클라인 남매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희박한 존재감에 그는 심심찮게 ‘언제 왔니?’라거나, ‘리사도 있었네.’ 같은 말을 듣고는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벨리사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것은 하루로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가 어디에 있든, 무슨 행동을 하든…

사람들은 벨리사를 놓치지 않았다. 시선으로부터 숨을 수 없었다.

 

맨얼굴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벨리사는 그 한마디로 정리했다. 여행길에 오르며 처음부터 얼굴을 가릴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워낙 존재감이 뚜렷하다 보니 사소한 사건에 휘말리거나 위병들의 오해를 사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수배범으로 오인당한다거나, 소매치기 취급받는다거나… 모두가 서로를 알고 지내는 마을에서는 상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마을을 출입할 때만이라도 주의를 기울이기로 한 것이다.

벨리사는 저 때문에 리온이 곤란을 겪는 건 싫었다.

“여기 맞지?”

“보자, 보자~ 흰사슴 여관, 맞네!”

“이 근방은 여관 이름에 다 동물이 들어가는 것 같아.”

“그러게. 저번에 들렀던 곳은 고래였나?”

“아니, 늑대.”

편지의 주인인 귄체는 흰사슴 여관의 급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편지를 받고는 아주 기뻐하며 그들의 저녁 식사에 구운 고기 한 덩이를 더 내주었다. 삯을 더 주겠다는 걸 벨리사가 거절하자 그를 대신해서 나온 호의의 표시였다. 며칠간 건량만 먹고 지냈던지라 벨리사는 그 호의를 더 없이 기뻐했다. 김이 오르는 돼지고기 구이, 치즈를 위에 올린 으깬 감자, 오리고기를 곁들인 양배추 버섯샐러드와 오믈렛 등이 차려진 식탁을 보고 식욕이 좋은 벨리사는 물론이거니와 리온도 갓 만든 따뜻한 음식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들어간 방의 침구는 짚을 새로 채워 넣은 티가 나 귄체의 호의가 저녁 식사에 그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침에 고맙다고 해야겠네.”

“응. 우와, 눕자마자 잘 수 있을 것 같아….”

그것은 리온 역시 마찬가지여서, 고른 숨소리가 방안에 울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자, 리온. 오늘도 수고했어.

…….

하하, 벌써 잠들었네.

 

 

“리온도 떠나보지 않을래?”

시온은 편지도 없이 불쑥 마을로 돌아왔다. 연락하고 오려고 했는데, 편지보다 자기 발이 더 빠를 것 같았다나. 마법에 출중하고 자연의 사랑을 받는 시온의 말이니 아무렴 그렇겠거니 싶었다.

“같이?”

“나랑 같이 가고 싶어?”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건 시온과 동행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굳이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단 의사 표현에 가까웠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 시온은 그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사실 방금 리사에게도 똑같이 말하고 오는 길이야. 리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온.”

그날은 벨리사가 그들 남매를 찾아온 날이었다. 시온을 반기러 온 거겠거니, 어렴풋 생각하고 문을 연 리온은 벨리사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리온….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이 열려도 안으로 들어올 생각조차 못 하는 듯 보였다. 리사, 들어와. 우두커니 서 있는 벨리사를 안으로 끌어들인 건 시온이었다. 그제야 그는 시온의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서러운 울음이었다.

사람들이 군중 속에서 자신만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벨리사는 전에 없던 일이 두려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일한 마음도 가졌다. 단순히 눈에 띄는 것뿐이라면 살아감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나, 하고. 약간의 불편은 감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마법서에 담긴 마법이 무시무시한 저주였다면 벨리사는 지금과 같은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삶이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게 일어난 변화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어린 벨리사는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벨리사가 아무리 클라인 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건 그의 언니 케이트였다. 생김새부터가 꼭 닮은 자매는 서로를 무척이나 아꼈다. 연년생 형제란 때론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 마련이기에. 케이트가 있는 자리에는 벨리사가 있었고, 벨리사가 있는 자리에선 케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떨어져 있더라도 행방을 모르는 법이 없었다. 성향에 사소한 차이가 있긴 했으나 그건 자매의 우애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벨리사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전까지는.

꼭 한 몸처럼 지내던 자매에게 이 일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눈에 띈다는 이유로 케이트보다 벨리사를 먼저 찾기 시작했고, 그건 그의 부모도, 케이트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트의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동생이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감춰지게 된 것이다. 하나였던 바위에서 떨어져나온 돌멩이가 된 기분이 아니었을까.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데도.

시온은 벨리사에게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듣는 중간중간 리온에게 부연 설명을 요청했다. 벨리사는 서러움에 잠겨있으면서도 케이트가 자신에게 한 말이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자매 사이에 찾아온 변화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는 억울함을 토로한다기보단 자신을 탓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원해서 얻은 능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리사, 산책 갈까.”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시온은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눈물로 얼룩진 벨리사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권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주 일상적인 말투였다. 이대로라면 집에 바로 갈 수 없잖아. 같이 걷고 나면 기분도 나아질 거야. 벨리사는 전부터 시온의 말이라면 껌뻑 넘어가는 경향이 있어, 순순히 그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섰다.

단순히 벨리사를 달래기 위해 나간 줄 알았건만 그런 이야기를 했다니. 리온은 잠자코 시온의 말을 기다렸다.

“케이랑 떨어져 지내보는 것도 리사에겐 나쁜 일이 아닐 거야.”

최근 들어 벨리사는 전과 행동거지가 많이 달라졌다. 얌전한 빵집 아이라는 별칭은 옛말이라는 듯 오지랖 넓게 온 마을의 일에 손을 얹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에 익숙해져 그런가 싶었는데, 케이트와의 일도 무관하지는 않은듯 했다. 무엇을 해도 주목을 떨칠 수 없으니 억지로 힘을 내는 것일까?

“리사가 무슨 선택을 할지 궁금하지 않니?”

“뭐, 걔라면….”

 

“리온, 나 떠날 거야.”

그건 언젠가 들었던 시온의 선언과 비슷했다. 며칠 전 시온과의 대화에서 이 말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리온은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벨리사에게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헤헤, 놀랐어? 그 표정을 본 벨리사가 샐쭉 웃었다.

“언제.”

왜냐고,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벨리사는 그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당장의 질문에만 또박또박 답변했다.

“음~ 사흘쯤 뒤에.”

“준비할 게 많을 텐데.”

“시온 언니한테 배워뒀지.”

나 몰랐는데, 마을을 나가려면 영주님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언니가 아니었으면 그냥 나갈 뻔했지 뭐야. 그렇게 말하며 웃는 벨리사는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를 부추긴 시온은 벌써 나흘 전에 마을을 떠났다. 리온은 시온과 벨리사 사이에 정확히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그가 시온을 용케 따라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있잖아. 벨리사가 주저가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리온도 같이 갈래?”

묘하게 자신이 없는 권유였다. 시온과 리온은 남매이면서도 성향이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분명하게 달랐다. 닮은 점이야 분명 있지만 타인의 시선에선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지는 법이었다. 가장 큰 예로, 시온은 매사 의욕적이고 활기찼지만 리온은 무엇에 흥미를 가지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가 가진 특유의 여유는 주변을 건성으로 대한다는 오해를 사기가 쉬웠다. 벨리사는 스스로가 그의 예외임을 알았으나, 자신의 권유를 어디까지 받아줄지는 리온 혼자만이 아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리온은 말이 없었다. 이 애는 떠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구나. 이런 점은 정말 시온 언니랑 다르다니까.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벨리사가 씩씩하게 외쳤다. 에이, 그럴 줄 알았다. 나 다녀올 테니까, 건강하게 있어야 해!

그로부터 사흘 뒤, 마을의 초입.

“가자며.”

리온은 그 자리에 나와 있었다. 간소하게 꾸린 짐이나, 벨리사를 향해 대뜸 하는 말로 미루어보아 배웅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 멈춰선 벨리사를 재촉하듯 리온이 말했다. 얼른 가자. 지금 출발해야 저녁엔 옆 마을에 도착해. 벨리사가 빠른 걸음으로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안 나올 줄 알았어.”

“뭐… 나도 보고 싶긴 했어, 시온처럼.” 넓은 세상을. 끝까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듣고 벨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방은?”

“납품은….” 꼬박 밤을 새웠는지 리온이 가볍게 하품했다. “납품은 다 했어.”

“리온 없어서 사람들이 놀라겠다.”

“뭐, 자리 비운다고 써두긴 했으니까… 아.”

리온이 벨리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얇은 가죽끈에 나무로 깎은 펜던트가 걸린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새의 날개 모양이었는데, 이건 리온이 가장 잘 자신 있게 깎는 조각 중의 하나였다.

“어라, 나 주는 거야?”

“재료가 남아서. 전에 준 건 이제 그만 하고 다녀.”

목공을 배울 무렵 리온은 처음 깎은 펜던트를 지금처럼 목걸이로 만들어 벨리사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벨리사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목걸이를 걸고 다녔는데,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는 지금 그 투박한 펜던트가 계속 눈에 밟힌 모양이었다.

“안 돼. 내 보물이거든.”

벨리사는 웃으며 새로운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두 펜던트가 나란히 겹쳤다. 리온은 그 모습을 지긋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글쎄….” 벨리사는 말을 늘였다.

보더라인까지 가볼까. 관용적인 대답이었다. 목적지가 없거나 갈피를 찾지 못할 때 왕국의 사람들은 보더라인을 언급하고는 했다. 보더라인은 왕국 서쪽에 있는 거대한 산맥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곳을 향했다가 돌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하여 통념적으로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는 곳. 그곳까지 향하는 사이에 목적이 생길 거란 의미에 가까웠다. 결국에는 발길 닿는 대로 걷겠다는 소리다. 이야기의 소재로나 쓰이는 곳을 진지하게 찾아가겠다면 그것 역시도 문제였다. 리온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일 년만이야.”

“응?”

“일 년만 같이 다녀줄 거라고. 그다음은 알아서 해.”

“아하하, 응!”

왕국력 240년, 봄.

작은 마을에 소란이 일었다. 빵집 근처의 공방이 다시 빈 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뜬 소문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였으나… 마을을 떠난 리온과 벨리사가 그 소문을 듣는 것은 앞으로 한참 뒤의 일일 것이다.

 

 

늦은 밤. 벨리사와 리온은 흰사슴 여관을 나섰다. 귄체가 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여관 입구까지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벨리사는 램프를 들지 않은 한쪽 손으로 오래오래 귄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시간에 출발하는 건 오랜만이네.”

이어지는 하품에 벨리사가 소리 내 꺄르르 웃었다.

“리온, 졸리구나.”

“평소라면 자고 있을 시간이니까.”

“그래도 기왕인 걸.”

“알아, 괜찮아.”

출발할 때 일 년으로 한정 지어둔 동행은 그의 곱절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으나 어영부영 계속되고 있었다. 리온도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여 벨리사는 구태여 그 한정된 시간을 상기시키지 않았다. 출발할 때 벨리사가 보더라인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탓인지 그들은 무한정 서쪽을 향해 걸었다. 그 사이에 이번의 편지 운송처럼 사람들의 부탁을 받기도 하고, 좀 더 형식을 갖춘 의뢰를 받기도 했다. 용병들이 흔히 하는 상단의 호위나 몬스터 토벌 같은 일 말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건만, 두 사람은 손발이 잘 맞아 까다로운 의뢰도 어렵지 않게 해내고는 했다. 그렇게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없다면 풍경을 즐기며 걸었다. 그 풍경은 때로는 도심의 축제이기도 했고, 때로는 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경관이기도 했다. 오늘의 경우는 후자였다.

“리온, 리온. 재밌는 얘기 들었어!”

아침, 귄체를 찾아간 벨리사가 오랜 친구와 이야기하듯 한참을 떠들다 돌아와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래도 귄체에게 일감이나 주변의 명소를 물어본 듯했다. 귄체는 자신에게 편지를 가져다준 이 두 모험가에게 큰 친밀감을 가지게 된 모양인지, 당장에 일거리는 없으나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요즘 날씨가 좋잖아. 그래서 밤이 되면 별이 엄청 잘 보인대.”

“별은 산에서도 많이 봤잖아.”

“아잇, 강에서 보는 거랑은 또 다르지~!”

벨리사가 주먹을 말아쥐고 아프지 않게 리온을 콩, 콩 두들겼다. 마을 외곽에 있는 숲을 지나면 폭이 넓은 강이 나오는데, 요즈음처럼 맑은 밤이면 별빛이 어두운 강물에 비쳐서 하늘이 강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귄체의 설명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강이 있다는 곳이 또 서쪽이라 두 사람은 굳이 돌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리온, 발 조심해!”

“응.”

벨리사는 짧은 보폭으로도 열심히 걷는 사람이었다. 리온이 그의 성격에 맞게 느긋하게 걸음을 걷다 보면 어느새 차이가 벌어져 벨리사가 저만큼 앞서나가 있고는 했다. 그러다 문득 리온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면 가만히 자리에서 멈추어 그를 기다렸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가만 서 있는 모습에 리온이 성큼 다리를 뻗어 벨리사와의 간격을 줄여갔다.

“곧 도착할 것 같은데.”

“물 냄새 나는 거 같기도!”

험한 산을 넘어 도착한 것 치고 마을에서부터는 지형이 그다지 별나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개간이 한창인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는 활엽수림이었다. 옆 마을로 이어지는 길인 건지 이레 동안 걸은 산길보다는 잘 정돈되어있어 걷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숲을 빠져나올 즈음에는 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우와!”

“오….”

강 위로 탁 트인 하늘에는 손톱처럼 가느다란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이 미약하여 하늘에 점점이 수 놓인 별이 훨씬 밝게 느껴졌다. 그림 같다. 벨리사가 내뱉은 감탄사와 같이, 물줄기처럼 뭉쳐진 별의 길은 정말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린 그림인 마냥 아름다웠다. 강에 비친 별빛 역시도 그랬다. 유속이 느린 넓은 강은 물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흘렀다. 물결이 거의 치지 않는 강은 하늘에서 쏟아진 빛을 온전히 담아내 정말로 하늘이 강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밤하늘 같아!”

거기서 나는 이곳에서 살게 되어 행복하다고 생각했어. 귄체는 이 풍경을 설명하며 그렇게 말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생각을 가질 법한 풍경이었다. 보러오길 잘했네. 리온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나직하게 말했다.

야영하려면 숲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잠시 강을 따라 걸었다. 벨리사가 내내 하늘을 보며 걷느라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해, 결국엔 리온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보곤 발 조심하라더니.”

“아하하, 그치만~ 너무 예쁜걸.”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잘 보이고.”

“응, 별 무지무지 많다~.”

그러고 보면 전에. 여전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채로 벨리사가 운을 띄웠다. 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잖아.

“아… 그랬지.”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도록 살아온 마을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의기양양하게 출발했다고 해도 목적 없는 여정을 계속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에서라도 조언을 얻고 싶었는지, 벨리사가 노점에서 점을 본 적이 있었다. 점술사는 처음 보는 카드를 뒤섞어 뽑고는 점괘를 읊었다. 벨리사가 말하는 별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점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 그 점, 정확하게는 떠오르지 않는데~ 리온이랑 했던 얘기는 기억하거든.”

리온은 무언가를 잘 잊는 법이 없어 점괘를 비교적 똑똑히 기억했다. 요약하면 소망이나 목표를 향해 가라는 말이었고 그것을 별에 비유했다. 벨리사는 말했다. ‘나는 내가 있을 곳을 찾고 싶어.’ 케이트와의 불화를 피해 마을을 벗어난 벨리사가 할 법한 말이었다. 저와 달리 리온이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않자 벨리사는 거듭 그의 소망에 관해 물었다. 그때 리온은….

“잘 모르겠다고 했잖아, 바란다는 거. 찾고 싶은 것도.”

“그랬었지.”

당시에 벨리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대로 일단락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벨리사가 이 상황에서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리온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세상에 이렇게 별이 많은데, 리온에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단 하나의 별이라는 거.”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그건 너무 외로운 일인걸.”

나는 리온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벨리사가 보여주는 진심은 가끔 사람의 말문이 막힐 정도로…… 다정했다. 더 없이 상대를 위하고 있는, 그 어떤 오해의 여지도 없는 곧은 마음.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내 별을 같이 찾아주고….”

“어쩌다 이렇게 길어졌지….” 벨리사는 최초의 일 년을 언급하는 리온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뭐, 결과가 어쨌든 리온이 외로울 일은 없겠지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야,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까!”

“나 참….”

하하하. 잔잔한 물결 위로 벨리사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두 여행자는 계속해서 강을 따라 걸었다. 별빛이 오래도록 손을 맞잡고 걷는 여행자의 뒤를 따랐다. 향하는 방향은 서쪽. 그렇지만 그 걸음이 세상의 끝까지 닿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도….

 


(중략)

괴물들이 활보하는 땅.

수많은 사람이 향했으나 돌아오는 이 하나 없는 곳.

세상의 끝.

이제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너머에는 분명히….

어느 날 불쑥 나타난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저 산 너머에서 왔노라고.

나는 친애의 뜻을 담아 그들을 ▒▒▒라고 불렀다.


친구여, 첫 만남의 무례를… 너희는 나를 용서했을까?

나의 사죄는 너무도 늦어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일밖에 도리가 없다.

부디 이것을 읽는 이들이 그대들을 이웃으로 여겨주기를.

― 왕국력 3년, 어느 여행자의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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