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제 1차 창작 웹 교류전 「얼굴만 아는 옆집 사람」참여
2026년 04월
루마니아의 엘리사베타
플랫폼에 기적 소리가 길게 울렸다.
부쿠레슈티 역. 오스만으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기차에서 두 번째 기적이 울릴 때, 닫히지 않은 문으로 누군가 뛰어들었다. 오, 실례합니다. 문을 닫으려다 그를 마주친 검표원은 모자챙을 잡고 예의 바른 사과를 건넸다. 괜찮으신가요?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손님? 손님에게 폐를 끼칠 뻔했다는 곤란함도 잠시, 검표원은 거듭된 부름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손님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짐가방 하나 없는 가벼운, 어떻게 보면 초라한 몰골이었다. 고급스러운 침대칸이 딸린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대개 커다란 짐가방을 직원에게 여럿 안겨주는 편인데 말이다. 게다가… 돌이켜보니 열차는 이미 만석이다. 관광 회사의 주력 노선인 이 오리엔트 특급은 제아무리 내로라하는 사람이 달려와도 출발 직전에 자리를 구할 순 없었다. 경찰서장이나 한 도시의 시장쯤 되는 사람이 달려오더라도 마찬가지다. 케이프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 쓴 그에게 검표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손님, 표와 여권을 확인하겠습니다. 열차를 착각한 손님이라면 어서 돌려보내야 했다. 직업적 사명감이 차오른 검표원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르케지, 한 명.”
표도, 여권도 꺼내지 않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완전히 벗지 않은 후드의 아래로 그의 눈이 번뜩였다. 검표원은 그 눈을 똑똑히 바라볼 수 있었다. 후드에 얼굴 절반이 가려 그림자가 졌음에도 그 눈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건 아주 붉은색의….“객실로 안내해.”
검표원이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저를 따라오세요, 외투를 들어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 손을 물렸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열차가 출발했다. 철로와 바퀴가 맞부딪히는 소음에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옆의 검표원뿐이었다. 침대칸의 특실 앞에서 문을 열기 전 그가 검표원에게 물었다.
“이 객실을 쓰는 사람은 몇 명이라고?”
“한 명입니다.”
“이름은?”
그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말하라 해도 이보다 자연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검표원은 생각했다. 이는 자명한 명제.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은,
“루마니아의 엘리사베타 님입니다.”
와일드독의 리사
“7년 전, 너는 어디서 뭘 했지?”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야 하는 네겐 필요치 않은 이야기야. 그 말에 시어도어 헌트는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바라는 태도가 이것이라면 확실히 그리 대해주겠다는 듯이. 그게 아니어도 엘리사베타가 제 존재를 실토했을 때부터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녀석, 귀찮은 능력이 있잖아…. 엘리사베타가 가진 고유의 힘과 관계없이 둘의 눈이 마주치고, 엘리사베타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저항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는 금방 단념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벌써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나’답게 살았지. 그 한마디를 하자 몸을 강제하던 힘이 물러갔다. 애석하게도…. 제 목을 틀어쥔 채 검을 들이밀고 있는 상대에게 ‘엘리사베타’는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그는 살면서 몇 번이나 이 말을 들었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같은 말을 듣게 될까. 아아, 가여운 시어도어 헌트!
“시어도어 헌트. 나는 네가 찾는 뱀파이어가 아니야.”
욕설과 함께 단검이 거두어졌다. 엘리사베타는 그가 몸을 물리고 나서야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하, 힘이 세기도 하지. 너스레를 떨며 기침을 한 것과 별개로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분명 멍이 들었을 텐데…… 하지만 엘리사베타는 보통의 무언가로 볼 수 없었고 통상적인 사람이라곤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테오.” 엘리사베타가 평소와 같이 시어도어를 불렀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목소리였다. 욕설 섞인 한숨을 내뱉던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엘리사베타는 그와 정반대로 환하게 웃었다. “이제 돌아가자.”
그리고 걸음을 돌렸다.
어디로?
갈 곳이라고 해봤자 레드 크라운이다. 엘리사베타는 시어도어보다 한발 앞서 걸었다. 그 모습을 본 시어도어는 반대로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향하는 방향은 같았으나 서로 일행이라고 볼 수 없는 간격이 되었을 즈음, “리사 아니니.” 그를 알아본 상인이 손짓했다. 그는 팔고 남은 것이라며 엘리사베타에게 기름에 튀긴 빵을 나눠주었다. 남은 것이라기엔 아직 따뜻했지만, 엘리사베타는 능청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먹을래? 그는 자신의 비협조적인 동행인에게 빵을 내밀었다. 승낙도 거절도 없이 기가 찬다는 눈빛만 돌아왔다. 싫으면 말고. 엘리사베타는 뜨끈한 빵을 입에 물었다. 경쾌한 발걸음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이 평소와 똑같았다. 방금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시어도어도 그 장단에 어울려주지 못할 건 없었다. 하지만, 뱀파이어와 인간 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감정은 늘….
“진짜 안 먹어? 맛있는데.”
“됐어.”
엘리사베타에게 그 말은 꼭 ‘지금 그게 넘어가?’ 내지는 ‘정신머리 한 번….’ 같은 뜻으로 들렸다. 그럼 내가 다 먹어야지. 남은 건 헤이스 주고. 엘리사베타가 소리 내 웃었다. 그러든지. 그러는 와중 둘의 간격이 또 넓게 벌어지는 바람에, 시어도어의 대답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있잖아. 그에게 목소리가 닿을지 확신할 수 없는 거리에서 엘리사베타가 운을 띄웠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어조였다.
“‘리사’는 이 도시를 좋아해.”
“그게, 뭐.”
“너도 좋아하고.”
“…….”
대답하지 않는다고 들은 말이 사라지는 게 아닌데도 시어도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엘리사베타는 그의 곤경을 즐기는 듯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으나―이건 꼭 웃음소리의 문제만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의 거리는 언제나 가지각색의 이유로 소란스러웠으므로 관심은 금세 거둬졌다.
“이것 참.”
도망갔네. 시어도어는 더 이상 엘리사베타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그의 기척이 사라진 것 정도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군중 속, 거리에 홀로 남은 엘리사베타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레드 크라운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나쳤지만 돌아보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계속….
평생을 그래왔듯이.
✴
머큐리와 가이아가 귀환한다! 레드 크라운, 와일드독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많은 헌터가 모여 있었지만, 그 사이에서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단연코 엘리사베타였다. 머큐리, 가이아, 엘리사베타. 세 사람이 와일드독에 합류한 이후로 머큐리와 가이아는 주로 외국에서 온 의뢰를 도맡아 메트로폴리스에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으니 엘리사베타가 재회를 기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야호! 언제 온대? 나흘 뒤? 진짜? 신난다~! 환호성을 내지르는 그를 누군가는 철없다는 듯 바라보았고, 누군가는 함께 기뻐해 주었고, 누군가는 그저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중 하나는 시어도어였고, 하나는 타냐였다. 몇 개의 시선이 더 그에게 닿았다 떨어졌으나 엘리사베타는 무시로 일관했다. 그들은 어차피 이 자리에서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거야?”
레드 크라운을 나서는 엘리사베타의 뒤를 타냐가 따라붙었다.
“뭐가?”
“두 사람이 돌아온다잖아.”
“일단 집부터 청소해야지! 깨끗한 집에서 맞이하고 싶거든.”
엘리사베타는 ‘그’로서의 답을 곧바로 말하며 생각했다. 전보가 도착한 것도 벌써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술집을 나오며 마지막으로 본 건 입구에서 하품하던 헤이스팅스였다. 나머지는 흩어진 지 오래였고, 남아있는 몇몇은 낱말 몇 개로 맥락을 파악할 만큼 명민한 자들이 아니었다. 뭐, 이 정도면 상관없겠군. 타냐는 그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불만이 많은 눈빛이었다. 내가 지금 그거 물었어? 라고 말하는 듯한 모양새에 엘리사베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말고?”
“말고. 그, ―운을 띄워두고 타냐는 잠시 고민했다― 같이 지내는 게 싫을 수도 있잖아, 이제는.”
그는 원하는 말을 간신히 돌려 표현했다. 엘리사베타가 긍정했다. 그럴지도 몰라. 경쾌한 발걸음과 달리 그 말은 아주 낮고 조용했다. 엘리사베타가 그들에게 건 암시는 이제 유효하지 않다. 마주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단순히 떨어져 지낸 시간이 오래되어서, 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라미아의 힘은 결국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 ‘강한 염원일수록 거듭해서 말해야 해.’ 언젠가 이 어린 뱀에게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지.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계산보다 오래 머물렀다는 뜻이다. 그는 이제 ‘엘리사베타’를 유지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장 빨리 허물어지는 것은.
“가야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 주거지가 보였다. 조금만 더 걸으면 머큐리, 그리고 가이아와 함께 살던 집이 나올 것이다. 이 집을 헤이스팅스에게 넘길 생각도 했었는데… 그건 싫다니 알아서 하겠지.
“결국 그렇게 되나… 어디로 가게.”
오래 머물렀다고 해도 몇 년. 그래봤자 손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기간이다. ‘나’에게는 찰나와 다름없는 시간. 놓고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골목길 너머를 바라보던 엘리사베타가 타냐의 모자를 꾹 눌렀다.
꼬맹아, 그런 건 언제나 정해져 있지 않았단다.
이제 안 와. 그 말은 무거운 형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겹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엘리사베타가 같은 말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인물이 필부는 아니니 어지간히 알아서 들었겠지. 레인 S. 카르밀라는 엘리사베타가 바닥에 집어 던진 인간을 무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힘줄을 죄 끊어놓았는지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제대로 된 몸부림도 치지 못했다. 어린 뱀파이어가 ‘식사’를 연습하기엔 제격인 상태였다.
“며칠이나 되었다고.”
“슬슬 말 한마디 값 치를 정도는 되지 않았나?”
“이율이 높다고 했을 텐데.”
“누가 이 바닥 큰 손 아니랄까 봐….”
메트로폴리스의 세력 줄다리기에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정도로 단순하게 표현하기엔 거대한 사건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이 일어난 후, 엘리사베타는 몇 차례 꼬마 뱀파이어 미쿤다의 식사를 도왔다. 레인과의 약속 때문이라지만 그들의 삶에서 구두 합의가 무슨 큰 효용이 있겠는가. 엘리사베타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내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는 레인이 무슨 뜻으로 이 어린 뱀파이어를 곁에 두는 것인지 궁금했다. 내리사랑이라도 실천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인지, 가엾은 아이에게 책임이라도 느끼는지, 저는 이해하지 못할 다른 뜻이 있는지……. 하지만 엘리사베타는 그들의 곁에 오래 머물 뜻이 없었으므로 답을 알진 못할 것이다. 이 정도의 호기심으로는 그를 이 땅에 발붙일 수 없었다. 레인도 엘리사베타가 메트로폴리스를 떠나리란 사실 정도는 익히 예상했으므로 선언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빚이니 값이니 하는 것도 그들에겐 시답잖은 화제일 뿐이다. 레인이 언젠가는 큰일을 벌일 거라는 듯이, 자신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재현할 테니 손을 보태라 말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지, 엘리사베타가 그 역사적인 순간에 자리할지는 때가 되어봐야 아는 일이다.
뱀파이어의 시대라니,
혼란하고 달콤한 문장이기는 하지.
“이 밤에 여길 온 걸 보면 떠날 준비는 다 했나 봐.”
뭐어. 엘리사베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마침 여기가 아리에스 근처라 다행이야.”
문소리가 들렸다. 안쪽 방에 있던 미쿤다가 레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나온 것이다. 그는 소극적이면서도 예의 바르게 엘리사베타에게 인사하더니 레인의 뒤에 붙어 고개를 내밀었다. 바르작거리며 바닥을 뒹구는 인간과 엘리사베타를 번갈아 보는 미쿤다에게 엘리사베타는 살갑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미쿤다, 안녕? 이리 와 봐. 미쿤다는 몇 번 보지 않은 엘리사베타에게도 꽤 호의적이어서, 부르면 부르는 대로 쪼르르 그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가끔 보면 레인 앞에 있을 때보다 표정이 풀어지고는 했다. 옆에 앉혀두고 동화책을 읽어준 건 레인이나 엘리사베타나 매한가지일 텐데, 고작 그것으로 친밀감을 표하니 엘리사베타는 그것이 웃기고도 신기했다. 어린 것이란.
“귀여워라. 꼬마, 누나랑 갈래?” 속된 말을 들은 것처럼 미쿤다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아이의 눈동자가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레인은 엘리사베타의 허튼소리에도 그들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모든 선택은 미쿤다에게 일임하겠다는 듯이.
잔뜩 울상이 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엘리사베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답이 늦네. 됐어. 나도 너 싫어.”
“누, 누나아.”
엘리사베타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자 미쿤다가 덥석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기분이 상했다고 여기는 건지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어머, 이러다 울겠네. 당연하지만 진실로 그를 거둘 생각은 없었다. 그냥 이런 꼴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거의 울기 직전인 어린 뱀파이어를 끌어안고 어르며 엘리사베타가 속삭였다. 나를 거절했으니 이제 꼼짝없이 레인이랑 있어야 해. 걱정마, 누가 네게 손을 뻗어도 레인보다 나은 녀석은 없을걸. 나보다 친절한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해도 따라 가면 안된다? 알았지? 자, 빨리 알았다고 해. 고개도 끄덕이고. 제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한 아이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엘리사베타는 미쿤다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아하하. 문득 엘리사베타는 레인이 그 사람을 부르던 호칭을 떠올렸다.
자신과 성이 같은 그를 레인은 선생님이라 불렀다. 저 아이는 레인을 무어라 부르게 될까.
“리사?”
레인과 미쿤다의 거처가 극장 아리에스 근처라 다행이라는 말은 단순히 동선의 문제였다. 소파에 누운 엘리사베타는 집주인의 부름에도 몸을 일으키지 않고 손만 들어 보였다. 한밤중에도 선글라스를 낀 미남자가 소파로 다가왔다.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열쇠도 두고 갔길래….”
그 말처럼 엘리사베타는 며칠 전 리온의 집 열쇠를 그의 집 탁자 위에 예쁘게 던져두고 나왔다.
“당신이 허락했으니까, 못 들어올 이유는 없지.”
초대는 이미 이루어졌고 철회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라미아의 삶. 누구보다 그것을 이해할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그렇네. 어떻게 들어온 거야.”
“비밀. 고민해보라고.”
그래봤자 문을 제외하면 외부와의 통로는 창문뿐이다. 밖에서 문을 딴 흔적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감쪽같은 솜씨였다. 문으로 들어온 게 아닐 뿐 엘리사베타가 주인 없는 집 소파에 누워있는 건 익숙한 풍경이라 리온은 곧 선글라스를 벗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보안을 좀 더 철저하게 하는 걸로 할까. 어쩐 일이야?”
“음~ 인사?”
“묻지 말걸.”
“그럼 인사조차도 없는 거고.”
최근의 리온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엘리사베타가 그가 제안한 의뢰를 거절한 탓도 있겠지만, 결국 전부 혈육인 시온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시온을 겹쳐보고 있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엘리사베타는 굳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빈집에 들어와 열쇠만 덜렁 두고 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역시, 이 남매를 떠올리면 보고 싶은 풍경이 있었다.
“전에….”
소파 끝에 걸터앉은 리온이 엘리사베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리온이 의뢰한 자료를 들고 찾아오면 머리카락을 빗어 새로 묶어주거나 무대에서 쓴 소품 같은 걸로 저를 장식하던 때와 비슷한 손길이었다. 노곤해진 기분에 엘리사베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알려주겠다고 했으니까.”
뜬금없는 말에도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애매하게 끊긴 화제임을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사베타는 그에게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지도해주겠노라고 말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시온을 찾아 틀어쥐라고.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 그의 인격을 부수고 소유하라고. 이것이 바로 엘리사베타가 보고 싶은 풍경. 실제로 그가 시온을 만나 바람을 이루어도 좋고, 영영 만나지 못해 그 행위에 사로잡힌 채 절망해도 좋았다. 그는 상대가 동족이라 할지라도 욕망에 잡아먹혀 혼돈 속에 놓이기를 바랐다.
“시간이 없어서… 실전은 알아서 해. 제인이든 메어리… 메어리 맞나? 마리안인가. 여하튼, 발에 채는 게 사람인데.”
“인간에게는 연습해봤자 아닌가.” 그의 능력이 닿을 곳은 결국 동족이었다. 동일한 조건의 피실험체가 아니라면 효과를 장담할 수 있을까. 타당한 의심이다.
“시온에게는 전에도 손 써본 적이 있다며? 그럼 될 거야.” 그러자 엘리사베타가 무책임하게 확언했다.
“결국엔….”
이어질 말을 이미 알고 있는 리온이 그의 말을 잘랐다.
“마음의 문제라?”
“그래.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끝장나는 혈통 빨 잘 살려봐. 엘리사베타가 미소 지었다.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와일드독의 리사는 이런 식으로 웃음 짓지 않는다. 같은 마력을 휘두르고 살아온 리온은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길진 않을 거야, 아마도….
그건 무척이나 오래전의 이야기 같았다. 자장가 대신 들려주는 구전설화와 같이. 허나 이것은 분명한 엘리사베타의 경험. 여전히 그가 취하고 있는 삶의 방식. 리온은 모든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엘리사베타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어떤 신분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아닌, 라미아의 힘을 활용해온 방식에 대해서. 인간들의 마음을 어떻게 파고들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그들의 머릿속을 휘젓고 복종시켰는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망치며 살아왔는지……. 긴 이야기의 끝에 엘리사베타가 주문처럼 리온에게 속삭였다. 설득과 이해가 무슨 소용이야. 곁에 두고 싶다면 부러뜨려서라도 가져야지. 굴종이라는 편한 길을 두고 돌아갈 이유가 있나. 당신이 바란다면 할 수 있어.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동이 터 오를 때 엘리사베타는 이미 메트로폴리스 밖에 있었다. 단출하다 못해 남루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차림새로. 주머니 달린 로브 하나가 그가 걸친 전부였다. 가방조차도 없었다. 종일 걷기에는 짐을 줄이는 편이 좋았다. 레드 크라운에서 말을 훔쳐 타거나 메트로폴리스에서 자동차를 빌릴 수도 있었겠지만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다. 우수한 헌터는 조금의 흔적도 놓치지 않는 법이니까. 이럴 때는 지치지 않는 몸이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해가 떠오르자 짙은 빛이 바닥부터 깔려 거리의 어둠을 몰아냈다. 엘리사베타는 그 빛으로부터 도망치듯 더욱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겼다. 뒷골목으로, 가로등이나 교각의 뒤로, 숲속으로…. 나무에 올라 산길을 가로지르며 엘리사베타는 집을 떠올렸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그의… 그들의… 집이었다. 머큐리, 가이아와 잠시나마 함께 생활했던. 와일드독 소속이라는 그럴듯한 신분을 얻자마자 두 사람을 국외로 내몰았기 때문에 집 안에 그들의 흔적은 많지 않았다. 실상 함께한 시간도 알려진 사실에 비해 짧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 서 있으면 두 사람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엘리사베타라는 인물에 너무도 몰입한 탓일까. 홀로 쓰기엔 허전한, 애매하게 넓은 집이다. 두 사람이라면 이런 감상은 들지 않겠지. 한 바퀴 돌아본 집은 사람 사는 흔적이 묻어남에도 불구하고 싸늘하기만 했다. 엘리사베타가 그 안에서 챙긴 건 단검 한 자루와 지도 한 장뿐이다. 전부 놓고 온 것에 미련은 없다.
정말로.
…….
…
…말발굽 소리가 상념에 빠진 엘리사베타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그는 일순간 숨을 죽이고, 소리의 반대편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동쪽으로. 목적지는….
✴
어느 밤, 루마니아의 외곽.
산길을 따라 달리던 여행자가 급히 말을 멈춰 세웠다. 뒤따르던 그의 동행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함께 멈춰 섰다. 잘 달리다 멈춰선 탓인지 말들이 투레질했다.
“메르, 왜 그래.”
서둘러 달려왔는지 피곤이 역력한 모습을 보이는 두 여행객의 정체는 메트로폴리스로 향하는 머큐리와 가이아였다. ‘메르’라고 불린 머큐리가 말 머리를 틀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그 말에 가이아도 경계심을 높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닦인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간 지 한참,
“분명 인기척을 느꼈는데.”
근방에서는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나야 늘 네 감을 의심치 않지만.” 아이고, 가이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짚었다. 돌아가자. 지금은 메트로폴리스로 가는 게 더 급해. 가이아가 그들의 목표를 되새기며 심각한 얼굴의 머큐리를 달랬다. 그들의 기억은 어떤 여행자와의 만남 이후로 듬성듬성 끊긴 상태였다. 어째서 우리는 밀라노에 있었을까. 메트로폴리스의 와일드독이란 어떤 단체이며, 계속해서 떠오르는 엘리사베타라는 이름은 누구의 것일까.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불분명한 상황에 확신을 구하기 위하여 그들은 메트로폴리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확인할 사안이 이만저만 많은 것이 아니므로 도착은 빠를수록 좋았다. 그들이 지금까지 무리하며 여행길을 서두른 이유기도 했다. 며칠을 밤낮없이 달렸다. 잠이 부족한 까닭에 신경이 곤두서는 건 당연지사다.
“우선은 메트로폴리스에 도착해서 생각하자. 거의 다 왔잖아.”
“…그래. 내가 너무 예민했나 봐.”
미련이 남은 듯 숲속을 돌아본 노련한 헌터는 한숨과 함께 말머리를 돌렸다. 숲을 벗어난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목적지는 메트로폴리스, 와일드독의 거점 레드 크라운이다.
엘리사베타가 메트로폴리스에서 자취를 감추고 삼 일 뒤, 와일드독에 두 명의 헌터가 복귀했다.
다음 날 레드 크라운의 벽에는 새로운 수배지가 붙었지만 이미 루마니아를 떠난 엘리사베타가 그 수배지를 보게 될 일은 없었다.
겐지(根枝)의 리사
고급스러운 기차여행을 기대하며 일등석을 예매했을 침대칸 승객들은 객실로 들어온 불청객을 인지할 새도 없이 비명횡사했다. 식사를 마친 뱀파이어가 오랜만에 벌린 또 하나의 입으로 입맛을 다셨다. 요마 라미아에게 흡혈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지만 차려진 식탁을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는 간만의 식사가 주는 고양감에 취한 채 침대에 몸을 뉘었다.
검표원을 본업으로 돌려보낸 뒤에 라미아 엘리사베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침대칸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었다. ‘들어오세요.’ 똑똑, 두 번의 노크 뒤로 이어진 한 마디. 기차로 대륙을 횡단하는 시대이다. 그 한마디로 운명이 바뀔 거라고, 침대칸 안의 인간들은 생각이나 했을까. 고개를 돌리면 차창 밑으로 쓰러진 시체가 보였다. 기차가 달려가는 방향과는 반대로 풍경이 어지럽게 흐르고, 시체 아래엔 피 웅덩이가 바닥의 융단을 축축하게 적시며 고여있었다. 엘리사베타의 손길로 꺾여버린 그의 삶처럼.
엘리사베타는 그 공간 안에서 기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승무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비명을 지르고도 남을 처참한 광경. 어쩌면 살인마가 나타났다며 수배에 들어갈지도 모르지. 다만 그 후의 일은 엘리사베타가 고려할 것이 아니다. 나약한 인간들의 수심 따위는 전혀…….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도 감지 못한 사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시르케지 역에 내리고서도 비슷한 일의 연속이었다. 몸을 눕히고 싶을 땐 아무 집이나 문을 열고 들어갔고 마차가 필요하면 마부를 홀려냈다. 가는 걸음걸음에 모두 핏자국이 찍힌 건 아니었지만 쓰임이 다한 자들을 어떤 방법으로 처리할지 결정하는 건 온전히 엘리사베타의 기분에 달린 문제였다.
그는 오스만을 벗어나고도 한참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가 때때로 꺼내 보는 지도는 프시케의 가게에서 받은 물건이었다. 정보상이라는 프시케의 직업 특성상 온갖 물건과 서류들이 그의 손을 탔으나 이 지도는 그의 개인적인 소장품으로 보였다. 실제로 그렇다고 했던가, 지도를 받으면서 한 말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프시케가 표시해준 그의 고향만큼은 지도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그 지도는 평소에 엘리사베타가 보던 것과 달리 정중앙에 커다란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존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제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땅이다. 이쯤이 루마니아라고 했지, 그리고…. 根枝. 그 대륙의 중간, 그림 같은 글씨체로 프시케의 고향이 표시되어 있었다. 엘리사베타에겐 익숙하지 않은 그 문자를 프시케는 ‘겐지’라고 읽었다.
여기까지 가는 길을 뭐라고 부르더라, 비단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엘리사베타의 시간은 길었지만 세계는 좁았고, 소문에 밝은 반면 지식은 매우 얕았다. 요행이 들통날 때쯤이면 이름을 바꾸고 이전까지의 삶을 버렸으니 겉핥기 이상으로 무언가를 파고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막을 건너는 캐러밴을 만났을 때야 그는 본인이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무역로가 실크로드라 불리는 것을 알았고 현 황제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약간의 거짓과 진실, 그리고 언령을 섞어 캐러밴과의 동행에 성공했다. 호감을 얻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죽어버린 친구의 고향에 찾아가 그를 애도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들은 엘리사베타가 대단히 어렵고 기특한 결정을 내린 것처럼 굴었다. 맨손으로 사막을 건너는 여행자는 없다. 캐러밴은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엘리사베타를 그들의 일행으로 받아들였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들도 겐지가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엘리사베타의 여정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청에서 온 심부름꾼까지 불러 지도를 보여주었으나 그는 자신은 남쪽 태생이라 그런 지명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프시, 대체 어디에 살았던 거야? 뭐, 구체적인 경로야 사막을 건너고 수소문해도 늦지 않았다. 그들은 낮에 낙타를 타고 이동했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캠프를 차렸다. 가끔은 수레에서 잠을 청할 때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엘리사베타는 잠이 든 척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엘리사베타, 밤에는 불에서 멀어지지 말아.”
“에, 무슨 일 있어?”
“낙타 한 마리가 안 보여.”
며칠이 지나자 낙타 한 마리가 사라졌다. 낙타가 묶여있던 자리엔 줄을 매어둔 말뚝이 거칠게 뽑혀 있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거대한 무역로는 상단이 지나는 길이 확고하므로 맹수의 습격은 적은 편이라며, 상단주는 의아해했다.
“어쩌면 말뚝을 너무 얕게 박아둔 걸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헤, 그럴게. 낙타 일은 유감이야.”
“어쩔 수 없지. 이런 손해도 감당해야 하는걸.”
그런 곡절도 겪어가며 사막을 건너자 초원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열린 바자에서 엘리사베타는 산림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모래 너머에는 초원, 그리고 숲이라. 이런 식으로 주변 환경이 삽시간에 변하는 건 그에게도 드문 경험이라 제법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럼 엘리사베타,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
“그쪽도.”
캐러밴과는 바자에서 헤어졌다. 사막을 넘으며 그들은 두 마리의 낙타를 잃었고, 한 명의 조난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작은 동행인이 벌인 소행이란 사실은 끝내 깨닫지 못했다.
✴
根枝, 겐지, 프시케가 설명한 뜻에 따르면 뿌리와 나무.
이름처럼 묵묵히 숲의 중심에 뿌리내리며 살아가던 마을이 최근엔 제법 소란스러웠다. 불청객이 찾아온 탓이다. 그의 이름은 엘리사베타. 몇 달 전 마을에 바람처럼 나타난 어린 소녀이다.
자그마치 삼 개월이다.
엘리사베타가 숲속에서 머문 시간이 말이다. 슬슬 제국의 복판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의 목적지는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서두를 건 없었으나 요즈음은 정말 일정이 계산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메트로폴리스에서부터 그랬으니 엘리사베타라는 이름을 버리면 나아질까?
프시케의 고향을 찾아온 것은 상당히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메트로폴리스의 집을 떠날 때 지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가는 길이라면 한 번쯤 못 들릴 것도 없지 않은가. 질려서 떠나왔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회고할 수 있는 장소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엘리사베타가 간과한 것은 그들이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왔단 사실이다. 프시케야 새로운 이름을 직접 지을 만큼 고향을 떠난 지 오래이니 대화가 자연스러웠으나 겐지의 사람들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겁박은 할 수 있었다. 엘리사베타는 숲속을 헤매다 마주친 주민을 위협하여 그들의 마을까지 안내하게 했다. 갑작스러운 손님―거기다 왈패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는―의 방문에 마을은 혼비백산했지만, 엘리사베타가 ‘리안’이라는 프시케의 옛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그의 신분은 귀빈으로 격상되었다. 석조 건물 하나를 통으로 비워 그의 잠자리로 내주었고, 끼니 때마다 성찬을 차려주었다. 그가 어떤 뜻으로 그 이름을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엘리사베타는 이 사람들이 집단으로 광기에 휘말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리안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그를 숭배하듯 모실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엘리사베타는 알아서 굴러오는 대접을 거절하는 성미는 아니었으므로 그대로 내리 한 달을 놀고먹었다.
‘재미없는 곳이에요.’
프시케의 말처럼 참으로 재미없는 마을이었다. 숲 한복판에 있는 이 마을은 마을 중앙을 제외하고는 돌을 깔아 만든 도로를 볼 수 없었다. 목재와 석재를 섞어 만든 집이 대부분이었고 커다란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살려둔 채 옆에 집을 짓기도 했다. 땅 위로 드러난 나무줄기를 피해서 길을 내놓은 꼴을 보면 어지간히도 나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 같았다. 요정을 모신다고 했었나, 그 요정이 나무에 사는 요정인가? 프시케에게 거기까지는 듣지 못했으므로 추측할 뿐이었다. 커다란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면 주민들이 발을 구르며 ‘아이리사!’ 하고 그를 애타게 불러대는 까닭에 추측에 힘이 실리긴 했다. 아이리사. 이곳의 주민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엘리사베타라는 발음이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이름이 불필요하게 길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그 부름은 종종 알리사라고 들리기도 해서 비슷하게 부르고자 한 노력이 느껴지기는 했다. 물론, 어떻게 불러도 엘리사베타가 나무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을 보내자 외부와 소통을 담당한다는 자가 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주기적으로 마을 바깥으로 행상을 꾸려 나가거나 필요한 물건을 조달해오는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국적의 상단과 교류한 모양인지 짧게나마 소통이 되었다. 손짓발짓을 더하면 서로의 의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아마 주민들은 엘리사베타를 먹이고 재우며 그를 기다린 듯했다. 통역까지는 바라지 않았으므로 엘리사베타는 그를 통해 직접 이곳의 입말을 배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능숙하게는 아니더라도 남의 의사를 알아먹을 만큼은 말을 깨쳤다. 엘리사베타는 슬슬 방 안에서 뒹구는 한량 같은 생활을 접고 마을을 쏘다녔다. 메트로폴리스를 벗어났으나 그는 아직은 ‘엘리사베타’였다. 쾌활하고 스스럼없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그와 쉽게 거리를 좁혔다. 처음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위협을 당한 주민만이 그를 먼발치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이라면…….
프시케는 이들이 요정을 모시는 자들이라 표현했으나 그 ‘요정’들은 마을에 섞여 사는 듯 보였다. 일부, 어쩌면 주민 전체가. 그들 중엔 눈에 띄게 수목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가 있었다. 외부인인 자신이 나무 곁으로 다가가면 못마땅해하는 자들도 자주 있었다. 요정. 나무를 빌어 태어나고 그와 삶의 여정을 같이하는 종족. 엘리사베타가 살아온 곳에서는 이들을 드라이어드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프시케 역시도.
“맥없이 굴던 이유가 있었네.”
엘리사베타의 혼잣말에 함께 공을 차던 아이가 무슨 말을 했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엘리사베타는 그 애에게 손을 내저으며 대나무 살로 만든 공을 돌려주었다. “아이리사, 더 안 놀아?” “내일 놀아. 내일.” 아이는 치이, 하고 입을 비죽 내밀었으나 엘리사베타는 그런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고는 자리를 떴다. 다시 돌아가서, 프시케가 영 기운이 없어 보였던 건 타고난 성미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의 나무와 떨어진 탓이리라. 그러면 이곳 사람들이 리안이란 이름을 듣고 그를 환대한 것도 이해가 갔다. 프시케가 마을을 벗어난 건 죽음을 불사한 행동이었다. 동족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이 드라이어드들이 시들어가는 나무를 보면서 얼마나 프시케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마 이들은 머지않아 그에게 환대의 값을 요구할 것이다. 그때가 오면 떠나야지. 재미없는 마을 같으니. 이곳에는 엘리사베타의 흥미를 돋울 만한 게 없었다. 꾸역꾸역 천명을 거스른 자만이 유일한 흥밋거리였으나 그는 이미 떠나온 땅에 있었다.
“엘리사베타 씨.”
같은 날 오후. 그들은 짐작대로 정중하게 엘리사베타에게 대화를 청했다. 엘리사베타의 예상보다는 빨랐다. 어디로 보나 지역 유지로 보이는 이 사람은 늘 그를 또박또박 ‘엘리사베타.’라고 불렀다. 어색한 발음이라도 제대로 부르는 것이 예의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엘리사베타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말하며 그가 엘리사베타를 데려간 곳은 이곳에 교회 내지는 성당의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삼 개월을 머물며 이곳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는 설명했다. 이곳은 장로께서 기거하는 곳입니다. 몇 개의 문을 돌아 돌아 건너가니 넓은 공간이 나왔다. 엘리사베타가 보기에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처럼 보였다. 방에는 탁자 하나를 제외하면 집기가 없었고, 그 탁자에는 연륜이 지긋해 보이는 노파가 앉아있었다. 소개하지 않아도 그가 장로이며, 드라이어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엘리사베타는 맞은편에 놓인 빈 의자를 발끝으로 끌어내 장로와 마주 앉았다.
“어서 오세요.”
“얼마나 거창한 말을 하려고 이런 곳까지 부르는 건지.” 서로 미소 지으며 인사를 나누자 각자의 앞에 차가 놓였다. 드라이어드 장로는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곳에 오신 지도 벌써 석 달이네요.”
“엥, 벌써 그렇게 됐나.” 엘리사베타가 가볍게 능청을 떨었다. “매일이 다르지 않으니 날이 가는 것도 모르겠단 말이야.”
“이곳은 그런 곳이지요. 머무르며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요.”
“음…. 나만 말 배우니까 억울해. 너네도 배워.”
장로가 웃음을 지었다. 대화가 본론을 향해 가지 않고 빙글빙글 돌았다. 장로가 저를 부른 이유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엘리사베타는 자신이 먼저 서두를 열지 않았다. 간절한 쪽이 굽히는 게 당연하잖아?
“이제는 듣고 싶네요.” 그 말투는 꼭 엘리사베타가 짓궂다고 꼬집는 것 같았다.
“무엇을.”
“아시잖아요.”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장로가 덧붙였다. “샤오리는 어디에… 아니, 잘 지내고 있나요?”
샤오리, 샤오리. 속말로 두 번을 되뇌고야 그것이 리안을 부르는 말이란 걸 깨달았다.
“대충은 알잖아? 죽진 않은 거.”
“그것까지 아는 건가요.”
“내가 보기보다 좀 오래 살았어.” 엘리사베타가 샐쭉 혀를 내밀며 웃었다. 장로 옆에 우두커니 선 몇몇 드라이어드가 엘리사베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거참, 딱딱하기도 해라.
“그래도 우리는 늘 그 아이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참 애틋하지만,
“지금은 잠깐 방황하지만,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참으로 제정신이 아닌 마을이긴 했다. 엘리사베타가 파안대소했다. 머무르는 동안 그의 경박한 태도에 대해서는 익히 전해 들었는지 장로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혹시 돌아간다면 저희의 편지를 전해 줄 수 있나요?”
“심부름꾼으로 쓰겠다?”
“물론 샤오리의 친구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값은 치르겠다는 뜻이다.
“아하하, 원수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
엘리사베타는 이렇다 할 대답 없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펼치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엘리사베타를 여기까지 데려온 안내인이 장로 대신 지도를 펼쳤다. 작은 탁자 위에 지도가 꽉 들어찼다. 엘리사베타는 손으로 지도의 구석을 쿡 찔렀다. 시선이 그의 손끝으로 모였다.
루마니아였다.
“메트로폴리스, 루마니아.” 정보상의 주소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바로 답을 찾아가면 재미없잖아? “알 만한 녀석들이 있는 곳을 알려주지. 극단 아리에스, 레드 크라운, 아니면 감시탑… 어디든 가서 ‘프시케’를 말하면 원하는 바를 얻을 거야.”
짧게 배운 말로는 그 모두를 담을 수 없어 엘리사베타는 필기구를 요구했다. 곧 누군가 세필 붓과 종이를 들고 왔다. 지명을 휘갈겨 쓴 종이 조각을 그들은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의 프시케에 대하여 설명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데, 그럼에도 저렇게 설레는 꼴이라니….
“남은 건 가져가도 되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리사베타는 종이 한 뭉치를 손에 쥐었다. “편지를 쓸 테니 당신들의 샤오리에게 내 용건도 전해 줘.”
“심부름꾼으로 쓰시려고요.” 장로가 엘리사베타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거라도 들고 가야 만나줄걸? 장담해.”
그는 핀잔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안내인은 이미 문밖에 서 있었다. “데려다주는 거야? 안 그래도 길 못 외웠는데.” 엘리사베타는 문지방을 넘다 말고 장로를 돌아보았다.
“15년이라며? 여길 떠난지가.”
“그렇게 되었죠.”
“그래도 기다리고 있는 건가.”
“말씀드렸잖아요.”
샤오리는 돌아올 거랍니다. 이곳에서 살아갈 운명이니까요.
엘리사베타는 아무 말 없이 응접실을 나갔다. 때론 유감을 표하는 것조차 수고스러우므로.
돌아가는 길에 엘리사베타는 안내인에게 리안의 나무를 보여달라 고집을 부렸다. 그는 엘리사베타의 요청을 탐탁잖게 여기면서도 표가 나지 않게 표정을 잘 갈무리했다. 엘리사베타가 루마니아에서 여기까지 온 노고를 생각해서인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계곡을 넘어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인지 길도 없는 곳이었다. 한참 걸어 들어가던 엘리사베타는 따로 묻지 않아도 리안의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그야, 울창한 숲속에 한 그루의 나무만이 잿빛이었기에.
“엘리사베타 씨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 나무를 보며 샤오리의 무사를 추측합니다.”
“걱정도 하고?”
“그렇죠. 이런 모습이니까.”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앙상한 나무를 그는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엘리사베타도 그를 따라 나무껍질 위에 손을 얹었다. 나무껍질은 습기를 머금지 못해 손을 대는 곳마다 표면이 갈라졌다. 손바닥에 버석거리는 가루가 묻어 나오는 게 꼭 병이라도 걸린 꼴이었다. 곁에 선 드라이어드는 그 나무를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 10년도 전에 곁에서 달아난 자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가 돌아오리란 맹목적인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가. 이들은 어째서 나비를 손아귀에 쥐지 못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나. 삽시간에 이 마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불쾌해진 엘리사베타는 생각했다.
다 태워버리면 그만 아냐?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뛰어다닐 테고, 프시케는 이유도 모른 채 절명할 테다. 숲 전체로 불이 넓게 번지면 몇이나 되는 드라이어드가 죽음을 맞을까….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엘리사베타는 나무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려는 듯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안내인은 엘리사베타가 무슨 상상을 하는 줄도 모른 채 그에게 돌아가자고 손짓했다. 엘리사베타는 다시 그를 따라가는 와중에도 나무를 돌아보았다. 이곳에 부는 바람 한 점까지 예측하려는 것처럼.
다음 날.
“아이리사!”
엘리사베타와 공놀이를 하기 위해 찾아온 소년이 우렁차게 그를 불렀다. 아이리사? 그는 조심스럽게 엘리사베타의 방문을 열었다.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안쪽에서 훅 바람이 끼쳐왔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아이리사, 나 왔어. 오늘도 같이 놀자고 했잖아…. 소년이 거듭 엘리사베타를 불렀으나 방안은 원래 빈집이었던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엘리사베타를 찾는 소년의 뒤, 탁자에는 가지런히 접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겉에 ‘프시케에게.’라고 적힌 종이 안에는 나뭇잎 한 장만이 들어있었다.
시들어 가는 리안의 것이었다.
어딘가의 나
나는 대륙 남쪽에 있었다. 눈과 오로라, 빙하를 찾아 북쪽으로 가기 위해 떠난 여정인데 헤맨 끝에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무작정 북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겠으나 최근 그 근방에 전쟁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접하곤 방향을 틀었다. 그 김에 제국의 대도시를 돌았다. 제국까지 오는 길도 그랬으나 이곳은 신선함의 연속이었다. 넓은 땅, 어딜 가나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사람들, 소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호방함, 웃는 표정 너머로 읽을 수 있는 비관들…. 빙하 아래로 들어가 몸을 눕히겠다는 목표를 잊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떠도는 와중 여흥은 되었다. 그곳에 가면 이런 광경도 없을 테니까. 하얀 얼음과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만이 나와 함께할 테니까. 마음속의 흔들림은 얼어붙고 고뇌 역시 무의미해지겠지…. 그랬다. 나는 허무를 달래려 동토로 가는 것이다.
나는 전쟁을 피해 북쪽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을 수소문했다. 선택지는 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신세계로 가야 했다.
이 항구도시에는 드물게 아메리카 본토로 들어가는 상선이 있었다. 배편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비렁뱅이를 도우려던 어느 상냥한 가족은 영원히 그 배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무역상과 이민자가 섞인 상선에서 나는 돈 냄새를 맡아 이국까지 찾아온 부호의 차림으로 갑판에 서 있었다. 출발을 알리는 우렁찬 뱃고동이 울렸다. 어떤 역에서 들었던 기적소리보다 훨씬 거대했다. 이제 이 배는 한 달간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닿을 것이다. 배는 오랜만이었다. 이 이야기는 누구랑 했었더라…. 상념에 빠진 사이 땅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야.
작은 소리와 함께 다리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려보니 정장을 차려입은 아이 한 명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눈을 팔기라도 한 건지. 가지런한 자세에서도 당황이 묻어나왔다. 죄송해요, 미스.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를, 하얀 뺨을, 가는 목을 바라보았다. 어깨에 손을 올리자 아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저희 아이가 결례를 끼쳤습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
나의 손이 아이의 목에 닿기 전에 그의 아비가 도착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굽혀 앉아 아이의 옷을 털어주었다.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답니다. 그렇지?”
“아… 네! 맞아요.”
“이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친절하시군요. 그는 작은 호의에 완전히 벽이 허물어진 것처럼 웃었다. 소개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남자는 사업가였고, 가족들과 함께 청에서 일하는 형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곧 바람이 차가워질 거라며 나를 에스코트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가족과 함께 저녁을 들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들 좋아할 겁니다.”
“어머, 초대해주시는 건가요.”
“그럼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성함을 여쭙지 못했군요.”
뱃고동이 잦아든 자리에는 물살이 배의 표면을 때리는 소리와 증기관이 맥동하는 소리만이 일정하게 울렸다. 뭍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난간 너머로 희미해지는 땅을 바라보았다.
나는 저 땅에 이름 하나를 놓고 왔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完